Faust (파우스트)
〈책 속으로〉
베라도 어지간히 놀란 듯 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평상시의 습관대로 아무
말 없이 스커트 자락을 치켜올리고 구두 끝을 보트의 가로대 위에
올려놓았어. 이 때 문득 괴테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르더군(나는 얼마 전부터
완전히 괴테에 빠지고 말았다네)‥‥자네 생각나나--'수천의 별들이 물결
위에 춤추며 반짝이노라' 하는 시를. 나는 이 시를 소리 높이 낭송해
내려갔지. 낭독이 "나의 눈이여, 어이하여 그대는 내리뜨느냐?"라는 대목에
왔을 때, 베라는 살며시 눈을 들어올리더군(나는 그녀의 발 아래쪽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녀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걸세). 그녀는 바람
때문에 실눈을 하고 오랫동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이 때 갑자기
가볍게 빗방울이 들더니 수면 위에 물거품이 일기 시작했어. 나는 베라에게
외투를 주었지. 그녀는 그것을 어깨에 걸쳤어. 우리는 호숫가에 배를
대고--그 곳은 나루터가 아니었어--집까지 걸어서 돌아왔지. 그 때 나는
팔을 빌려 주었다네. 나는 줄 곧 무슨 말인가를 학 싶었으나 안 나오더군.
그러나 지금도 기억하네만, 단 한 가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지.--왜 당신
집에 있을 때, 마치 병아리가 어머니의 품 속에 숨어 있듯이 언제나 옐리초바
부인 초상화 밑에 앉느냐고 말이야. "당신의 비유는 정말 옳아요." 하고
그녀는 대답하더군. "저는 결코 그 날개 아래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을
거예요."
-본문발췌
이렇게 덧없는 결말을 예기치 못했다느니, 그런 돌발적인 사건이 나를
놀라게 했다느니, 베라의 본성이 그렇다는 걸 미처 몰랐다느니--이런 말을
나 자신에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녀는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침묵을
아는 여자였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남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겼을
때 곧 나는 그곳을 물러나야 했었는데, 나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걸세.--결국
이렇게 돼서 아름다운 자연의 창조물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만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안고 나 자신에 의해서 저질러진
처참한 결과를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걸세.
그렇지, 옐리초바 부인은 끈기있게 자기 딸을 보호해 낸 것일세. 그녀는
베라를 마지막까지 지켜 나가면서 최초의 실수를 보자마자 곧 자기 딸을
무덤으로 데려가고 만 거야.
편지를 마칠 때가 된 것 같군‥‥내가 해야 할 말의 백분의 1도 자네에게
전할 수가 없었지만, 나로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내 마음
속에 끓어올랐던 여러 가지 상념도 또다시 마음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게 될
테지‥‥편지를 마치면서 이것만은 자네에게 말하고 싶네. 다른 것이 아니라,
지난 수 년간의 경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확신을 얻었다네.--내
생활은 농담도 아니지만 오락도 아니다, 그렇다고 향락도 아니다‥‥생활이란
건 괴로운 노동이다. 거부, 끊임없는 거부--바로 이것이 인생이 지니는
비밀의 의의며,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인 것이다. 가령, 아무리 고상한
것일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상념이나 공상의 실행은 아니다. 오로지 의무의
수행--이거야말로 우리 인간이 주의해야 할 요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기
몸에 쇠사슬이 없다면, 의무라는 쇠고리가 없다면 인간은 인생 행로를
마지막까지 무사히 도달할 수 없을 거야. 누구든지 젊을 때는 자유로울수록
좋다, 자유로우면 자유로울수록 그마늠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겠지.
하긴 젊을 때라면 이런 사고 방식도 허용될는지는 모르지만, 준엄한 진실의
얼굴이 드디어 자기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게 되었을 때, 거짓 감정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고 뭐겠나.
그럼, 안녕! 그 전의 나라면 '부디 행복하기를'이라고 덧붙였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말하기로 하겠네.--생활에 노력하게.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슬플 때가 아니라 명상에 잠길 때면 나를 상기해 주겠나. 그리고
베라의 모습을 깨끗하고 순결한 그대로 자네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해 주기
바라네‥‥그럼, 다시 한 번 안녕!
자네의 P. B로부터
-본문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