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분석 (Doctrine of Fascism)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조명한 책.
현재 다큐멘터리 제작 중.
미국 대선을 기점으로 전세계에서 파시즘 열풍이 불고 있는 가운데, 북미 서점 판매 순위 7위 달성!
〈책 속으로〉
그것은 무솔리니가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덮어놓고 퍼레이드를 좋아하는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이며 자신의 참모습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 연극을 곧 잘하는 3류 배우와 같은 모습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하간에 자만심이 강하고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이기주의자요 기회주의자였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국민의 인심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이 후 이탈리아 전투파쇼는 자본가, 지주, 군부 중간층 등의 지지를 받았으며, 1921년에는 국가 파시스트당이 되었다.
초기에 미미했던 당세는 날로 커져 1923년에는 당원이 30만 명에 달했다. 테러 행위를 일삼는 파시스트당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 운동가, 더 나아가 모든 반파시스트 정치가들을 공격하거나 살해했다. 1922년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원은 로마진군(검은셔츠단)을 통해 세력시위를 보이고 국왕의 승인 하에 정권을 잡은 뒤, 무솔리니는 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26년에는 파시스트당의 일당 독재가 수립되어 당의 최고기관이 파시스트 총평의회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제한되었다.
파시스트 총평의회는 이탈리아 왕국의 로마천도이래 국교 단절 상태에 있던 로마 교황청과 라테라노 협정을 맺었다.(1929년)이로써 로마 교황청은 바티칸 도시 국가로 독립했으며, 카톨릭이 국교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은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카톨릭 교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경제의 악화에 대해서는 통제 경제를 실시하는 한편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대외 침략을 감행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으며(1935~36년), 1939년에는 알바니아를 병합했다. 국제 연맹은 이러한 이탈리아에 대해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고, 따라서 연맹의 위신만 실추되는 결과를 낳았다.
(중략)
일본에서는 진정 강력한 파시즘 정당이 존재한 일은 없었다. 물론 일본도 세계공황에 대한 여파로 인해 중산계급과 농민층은 인플레에 시달리고 있었고 빈부 차가 확대되었지만 파시즘은 유럽의 산물로 보고 일본에서는 오히려 이를 배척하는 풍조가 강했다. 또한 얼마 안 되던 파스시트들은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기는커녕, 천황을 비롯하여 지배자계급에게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는데 부심할 뿐이었다. 또한 이런 파시즘은 둘로 나뉘는데 대외적으로 ‘이시하라 간지’와 같은 대동아 선언을 통해 일본에서 가능한 한 전쟁에 보편적인 의의를 주어 전후의 이미지를 선명히 함으로써 일본 국민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민족에게도 호소하는 식의 접근과 대내적으로 ‘기다 이끼’와 같이 천황을 절대시하여 쿠데타를 성공시켜 천황과 민중을 연결시켜 특권계급을 대항하려고 한 접근이 있었다. 이후 군부파쇼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민주주의 빼았겨버린 일반 대중은 오직 획일적인 관료정치에 종속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독재제가 일부 계층에 의한 독재이며 한 개인에 의한 독재가 아니었기에 곧 지도층의 혼란(육군과 해군)이 왔고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소를 제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