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내린 밤
독립서점의 베스트셀러 〈시다발〉의 작가 엄지용
“오늘에서 내일로 흐르는
당신의 밤에
조용히 다가가
진심을 전합니다”
독립출판을 사랑하고, 독립서점을 자주 다니는 독자들에게 ‘엄지용’과 ‘시다발’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실물을 직접 본 적은 없어도 ‘시다발’이라는 단어는 한두 번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느 독립서점 사장님은 〈시다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다발〉은 독립출판을 수면 위로 올려놓은 작품이라고. 작가는 이 책으로 많은 독자들을 만났고, 큰 관심을 받으며 〈스타리 스타리 나잇〉으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독자들의 관심 덕분에 수차례 재쇄를 찍었지만, 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과 생활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더 이상 책을 찍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도 독립서점의 독자들은 〈시다발〉을 찾고 있다고 한다. 독립서점가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작가 엄지용이 지금까지 써왔던 글을 모아 〈네가 내린 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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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삶이란
뜨겁게 지는 태양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
살아갈수록
나아갈수록
내가 책임져야 할
내 몫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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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꼬마가 까치발을 바짝 들고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가고 있다
불편해 보이는데 표정은 해맑다
어렸을 때
나도 그러곤 했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는다는 것은
넘어지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나
이만큼
컸다고
-지하철 손잡이
“나와 당신, 우리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글을 씁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소중했던 날들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 밤. 작가는 까만 밤하늘의 별을 세며 사랑을 썼고, 달을 바라보며 순간을 함께해온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 작가는 별과 달, 그리고 우리로 가든 찬 밤을 잊지 않기 위해 진심을 담아 글을 썼다. 소박하지만 꾸밈없는 그의 글은 굳어 있는 마음을 툭 하고 건드리며, 소리 없이 다가와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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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던 매순간들은
그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어딘가에 먼지처럼 떠돈다.
그리고
그 먼지는 결국은 별이 되어 빛난다.
이 생각을 하면 밤하늘을 보는 일이 새로워진다.
별을 세는 일은 사랑을 세는 일이 되고,
별을 노래하는 일은 사랑을 노래하는 일이 된다.
나는 수많은 별을 세며,
수많은 별을 여기에 썼다.
그것은 사랑을 쓰는 일이었다.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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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마음은
강이 되어 정처 없이 흐르고
너는 그런 내 마음을
감싸안았다
바다가 보고 싶었고
너는 나를 감싸안았다
내 마음들이 너에게 흐르고 있었다
-속초바다
“오늘, 당신의 밤에도
기다리던 누군가가 내리기를”
작가는 살아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이들과 마주했던 순간들을 책《네가 내린 밤》에 담아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 친구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헤어진 그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나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을 순수한 글로 담았다. 소중했던 그날의 나와 당신, 우리를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는 작가의 글은, 얼어붙은 당신의 마음을 사르르 녹여줄 것이며, 애타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쓸쓸한 당신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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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에
우리 네 식구가 단칸방에 살던 때가 있었다
그 중 하루를 생생히 기억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빠의 손에는
세계여행 기차놀이 세트가 들려 있었고
나는 고사리 손으로
열심히 방 안 가득 레일을 설치했다
그날 밤 단칸방엔
밤새 기차가 돌아다녔고
기차가 도는 동안
나는 그 기차에 몸을 싣고 세계여행을 했다
그날 밤
단칸방은 지구만 해졌다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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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
창을 열어보니
세상이 온통 하얗다
이렇게 눈이 올 동안
나는 모르고 있었다
눈은 그렇게 어느새
세상을 모두 덮어버렸다
네가
내겐 눈 같다
내겐 어느새
네가 내렸다
-네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