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좀 빼고 삽시다
“내가 나를 먼저 알아야 해
다른 일은 전부 그다음 일이지”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대한불교조계종은 종단을 비판하는 등 승풍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명진 스님의 승적을 박탈했다. 2017년 5월 백기완, 김중배, 신경림, 염무웅, 함세웅 등 43명의 사회 원로들이 모여 명진 스님의 승적 박탈을 즉각 철회하라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허나 명진 스님은 조계종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부처님께서 한 나무 아래서 사흘도 머무르지 말라.” 하셨는데 그 가르침대로 살았는지 스스로 돌아보겠다고 다짐했다. 『힘 좀 빼고 삽시다』는 명진 스님의 50년 수행 여정이 오롯이 담긴 책이다. 반백 년 선방에서 수행한 스님이 이 책을 통해 아픔을 끌어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 하나다.
‘마음에서 힘을 빼라!’
마음에서 힘을 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묻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물으면 알 수 없고, 알 수 없는 상태란 어떠한 것도 결정하지 않은 막막하고 불안한 상태다. 스님은 이 상태를 어떠한 것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상태라고 말한다.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고 방황을 시작한 사고뭉치 소년이 묻고 또 묻는 수행자가 되기까지 세속에서 20년, 출가하고 50년 동안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니 모두 공부가 되었다고 말하는 명진 스님의 생애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무엇이 행복이고 불행인지 알게 될 것이다.
걷다가 넘어질 때 넘어지지 않으려고 힘을 주다가는 크게 다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유연하게 생각할수록 마음이 다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스트레칭하여 자주 풀어줘야 한다.
“수행은 나를 찾는 긴 여정일 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여행자와 비슷하다”
진실한 사람이란 자기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허물을 지고 가는 자, 갈팡질팡하는 자, 번민하는 자, 회의하는 자가 진실한 사람인 것이다.
“출가한 지도 오십 년이나 되니 사람들이 내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조언을 구하곤 한다”라는 명진 스님은, 일보다 사람이 힘들어서 회사를 관두고 싶을 때가 많다는 젊은이의 질문 앞에서 주저한다. 스님 자신 또한 “미운 사람이 있으면 엄청 미워”하곤 했고 치기 어린 행동으로 사람들과 다투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 생활이 힘들다는 젊은 친구에게 마냥 ‘미운 사람을 다스려라.’ 하고 말하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명진 스님은 자신이 모르는 일이라면 “모른다.” 하고 말하는 수행자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질문에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있다면 수행 생활을 오십 년 동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고백하는 수행자다. “답은 스스로 찾고 따져봐야 한다”라고 자신의 삶을 통해 말하고 있다.
명진 스님은 행자 시절 당대 최고의 스님으로 불리던 성철 스님 밑에서 수행하다 계를 받기 닷새 전 해인사 백련암을 뛰쳐나왔다. 승가 교육을 제대로 받아 “정석대로 수행한 잘 짜여진 수행자”가 되는 것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라는 게 “출가를 했는가 안 했는가, 결혼을 했는가 안 했는가, 늙었는가, 젊었는가, 비구인가 비구니인가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스승을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한 50년 수행 끝에 명진 스님은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모른다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격식, 체면, 권위가 아니라 얼마만큼 자기 마음을 비우고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그것 하나로 잣대로 삼는 게 수행”이기에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며 “필히 삶으로 써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한다”
50년 수행 끝에 오롯이 남은 한 가지 질문
나이가 들수록 몸도 마음도 뻣뻣해진다.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몇 년 전만 해도 허리를 구부리면 손에 땅이 닿았는데 이제 닿지 않는다. 몸이 굳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육신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누구나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은다. 명진 스님 또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데 취직하고 장가가서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다 죽고 싶었다.” 하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 재물을 얻는 것,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 명예를 얻는 것은 모두 저녁노을이나 아침 이슬처럼 허망한 것이다”라는 걸 알게 됐다. 재물, 지위, 명예 등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집착하게 하고 결국에 불행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잘 먹고 잘 사는 게 무슨 의미일까?” 하고 명진 스님은 묻는다. “뭐가 잘 사는 거고 뭐가 못 사는 걸까?” 명진 스님이 말하는 잘 사는 삶은 “몸에서 힘 빼듯 마음에서 힘 빼고” ‘나는 누구인가’ 묻는 삶이다. 부처 또한 허둥지둥 도둑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들이여, 잃어버린 패물을 찾는 일과 자기 자신을 찾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모든 틀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불교는 부처를 믿고 따르는 종교가 아니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이자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는 종교다.” 그렇기에 명진 스님은 “내가 나를 물을 때 부처가 온다”라고 말한다. “내가 나를 물을 때, 그 막막하고 알 수 없는 물음의 자리에 설 때” 우리는 부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명진 스님이 말하는 마음 수행은 그러한 것이다. “내가 나를 바로 알면 내 길을 가면 된다. 남 따라 살 필요도 세상의 요구를 쫓을 필요도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힘에 부치는
당신을 위한 작은 실천!
이 책은 2011년 출간되어 6만 독자의 사랑을 받은 『스님은 사춘기』 이후의 삶을 새롭게 담고 과거에 쓴 글 또한 지금의 마음을 담아 고쳐 쓴 개정 증보판이다. 평생 좌충우돌 살아온 명진 스님이 “힘 좀 빼고 삽시다”라고 말하니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명진 스님은 “끊임없이 좌충우돌 살아왔기에 오히려 평화에 대한 간절함이 크다”라고 말한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성찰하다 보면 어느새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평화로워야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전해줄 수 있다”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승적을 박탈당하고 첫 마음으로 돌아온 명진 스님, “평생 입바른 소리를 달고 살았으니 죽을 때도 큰소리쳐야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명진 스님은 “힘 빼고 살면 더없는 자유가, 무한한 행복이 거기 있다.” 말하며 지금도 묻고 또 묻고 있다.
책 속으로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 묻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내가 나를 물으면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있을까? 모른다. 내가 나를 모른 채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그 물음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중이 되었을까? 모를 일이다. 칠십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나는 묻고 있다. 이 물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힘든 시절, 때로는 책과 노래에 위로받았다. 어쩌면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더 많이 ‘나는 왜 살까?’ 하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알게 모르게 부처님의 손바닥 위를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행한 일이 잇따라 일어나는 내 삶이 괴로웠다. 그 괴로움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어릴 때는 참 내가 박복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누구인지 묻기 위해 그 시절을 지나온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 고통의 세월이 나라는 사람의 운명 속에 감춰진 또 다른 복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계속 쌈박질을 해댔다면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나이만 먹었을 것이다. 나는 고통스럽더라도 다음 생에도 어려운 환경에 태어나 갖은 고생을 하다가 부처님 법을 만나는 게 소원이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빈번하게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은 포만감일 것이다. 이런 일상의 작은 만족을 요즘은 ‘소확행’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바쁜 하루를 보내고 야식을 먹으며 느끼는 포만감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호사조차 수행자에겐 나쁜 장애물이 된다. 만족을 반복해서 겪으면 취향이 된다. 취향은 틀이 된다. 또한 취향은 하나의 집착이 되고 만다.
누구나 살다 보면 사춘기를 겪게 된다. 반항하고 대들고, 못된 짓, 엉뚱한 짓을 도맡아 하는 시기가 그때일 것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가장 순수한 물음은 바로 그 사춘기 때 본능적으로 다가온다. 유년기에서 어른으로 가는 그 시기에 ‘왜 살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이름이 남으면 뭐하고 남들이 알아주면 뭐하나? 나는 무엇일까?’ 하는 아득한 물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춘기 때 처음 다가왔던 물음으로 돌아가는 것, 나를 향한 물음으로 끝없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도를 향해 가는 것이다. 순수한 물음에 욕심이 붙어버리면 이미 그것은 아닌 게 되어버린다. 욕망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도를 구하려는 욕심 또한 그렇다. 도를 구하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욕심은 좋은 욕심이기 때문에 버리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이런 욕심 또한 모두 버린 상태여야 사춘기 시절의 순수한 물음에 다다를 수 있다. 구하거나 바라거나 얻고자 하는 것이 없는 상태, 버리고 버린 상태가 수행의 자리다.
성불한다는 건 뭐고 해탈한다는 건 뭘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깨달음에는 답이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거만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수행은 나를 찾는 긴 여정일 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여행자와 비슷하다. 새로운 세계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렵다. 과연 모른다는 건 뭘까. 모른다는 걸 내가 정말 알고 있을까.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견해가 되고 견해는 곧 내가 된다. 그것은 거짓되고 허망한 것이다.
진실한 사람이란 자기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허물을 지고 가는 자, 갈팡질팡하는 자, 번민하는 자, 회의하는 자가 진실한 사람인 것이다.
나는 확신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의 모든 다툼과 전쟁은 자기가 옳다는 믿음 때문에 일어난다. 내가, 내 생각이 과연 옳을까? 묻고 또 묻는 성찰과 회의가 있었다면 세상이 이토록 거칠고 무섭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성을 다해 수행하면 꼭 그 결과가 나타난다. 한 생각 한 생각 속에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을 때 그 정성스러움으로 기도가 이루어지고 수행에도 진전이 있다.
이 세상에서 꼭 이십 년을 살고 떠난 동생을 생각하면서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황량한 바람 앞에서 ‘이게 뭐지?’ 했던 그 물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죽음이란 뭐지?’ 내가 목숨처럼 사랑했던 동생은 이제 여기 묻혀 있는데 나는 거기에 대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숨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죽는 게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과연 무엇일까?
죽고 사는 게 뭔가. 이 몸뚱이가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 거고 숨을 쉬면 살았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나를 모르는 게 죽은 것이고 나를 깨달은 게 산 것 아닌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산 게 아니다. 죽음을 알면 그것이 바로 생을 아는 것이고, 생을 알면 죽음을 아는 것이다.
“나는 동생을 이곳에 묻었다. 대체 사는 게 무엇이고 죽는 게 무엇인지, 그걸 알려고 중이 되었어. 네가 나에게 그걸 알려줄 수 있겠니? 그렇게 해준다면 네가 만나자면 만나주고 결혼하자면 결혼하고 무엇이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
세상에는 이런 도인들이 곳곳에 있다. 우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할 따름이다. 부처님의 법은 나이가 말해주는 게 아니다. 중노릇을 오래 했느냐 적게 했느냐가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열 살 된 사미가 깨달았다면 백 살 먹은 큰스님이라도 엎드려 절을 해야 한다. 핵심은 오직 올바른 견처(見處)를 가졌는가에 있다.
공부를 잘해보겠다는 치구심이 지나치면 오히려 공부가 안된다. 공부는 억지로 용을 써서 되는 게 아니다. 간절하되 자연스러워야 된다. 마음에 힘을 빼고 쉽고 편안하게 하라. 공부가 좀 되었다고 좋아하지도 말고 공부를 더 잘하겠다는 욕심에 억지를 쓰지도 말고 그저 알 수 없는 그 자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게 공부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출가자라고 그저 보고만 있어야 할까. 이 세상에 사람 목숨보다 귀한 게 있을까? 불교이니, 예법이니 하는 틀에 얽매여 정작 중요한 것을 못 본다면 종교가 무슨 소용일까.
용화사는 어느 곳보다 지내기가 고생스럽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 년 동안 하안거를 나면서 고생이라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나는 송담 스님이 계신 선방에 가면 느껴지는 그 맑고 깊은 기운이 좋았다. 도의 힘이란 꼭 무슨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스님, 두목이란 말 아십니까? 두목은 ‘머리 두頭’에 ‘눈 목目’입니다. 두목이 가면 졸개들이 다 따라가는 것처럼 마음과 눈이 가는 쪽으로 우리 몸이 향하게 됩니다.”
도를 구하려는 마음이 간절하면 스승은 어느 곳에서라도 만날 수 있다. 머리를 깎았느냐 길렀느냐, 승복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옛말에 머리를 삭발하고 천 겹 만 겹 기운 누비를 입고 깊은 산중에 앉아서 도 닦는 체만 하는 속한 이가 있고, 저잣거리에서 하루에 소 열 마리, 양 백 마리를 잡아가면서도 도를 닦는 수행자가 있다고 했다.
승적을 박탈당하고 첫 마음으로 돌아왔으니 더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평생 입바른 소리를 달고 살았으니 죽을 때도 큰소리쳐야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한다. 다만 그런 선택이 자연스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도록 할 뿐이다. 천일기도 회향을 93일 남겨 놓고 산문을 나선 허물은 내가 안고 가는 거다. 천일기도는 끝났지만 내 기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천일기도는 진실한 수행자로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이 땅에 부처님 법을 널리 펼치기 위해 정성을 다하겠다는 내 원력의 표현이었다. 중생의 번뇌가 끝없는데 어찌 수행자의 기도가 끝날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실패하더라도 옳은 길을 갈 것이다. 내가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빛나는 성공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에 깨끗한 물을 담아도 시간이 지나면 물때가 낀다. 반짝이는 금반지도 시간이 지나면 빛을 잃는다. 이것이 수행자가 쉬지 않고 물어야 하는 까닭이다. 큰절이었던 봉은사 주지를 마치고 산으로 돌아왔다. 수행자란 절이 크건 적건 마음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나는 큰스님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불공평한 게 싫어서 출가했는데 절집에서도 크다 작다 논하고 있다. 크면 또 얼마나 크고 무엇이 크단 말인가.
나는 꼭 머리 깎고 출가를 해야만 중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룩한 척 불자와 겸상하지 않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이에게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삼배를 받는다면 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접받으려고 출가한 게 아니지 않은가.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는 말처럼 정말 좋은 맛이란 반드시 담백한 법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쉽고 재밌게 선禪을 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미 세상이 딱딱 정해져 있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접해도 시큰둥하다. 속된 말로 ‘꼰대’가 된 것이다.
극락과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 곁의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면 그 자리가 극락이 되고 그들을 외면하고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면 그 자리가 지옥이 된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 재물을 얻는 것,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 명예를 얻는 것은 모두 저녁노을이나 아침 이슬처럼 허망한 것이다. 재물, 지위, 명예 등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면 그것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니라 집착하게 하고 결국에 불행에 이르게 한다.
수행은 세속을 버리고 산중에서 쓸쓸하고 외롭게 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유를 무한하게 확대시켜 더 큰 자유와 지혜를 얻게 해주고, 비우고 버림으로써 오히려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공부가 바로 수행이다.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가치는 어디에 둬야 하는 것인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인가. 오래 살면 왜 좋은가. 매일매일 숨 쉬며 살고 있는 이놈은 뭘까.
‘쥐고양이’라는 말이 있다. 쥐를 잡아먹는 쥐를 일컫는다. 여러 마리의 쥐를 한곳에 모아두면 쥐가 쥐를 잡아먹게 되고 결국 한 마리만 남게 된다. 나는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마음의 쥐를 잡는 쥐고양이를 풀었던 셈이다.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마저 버릴 때가 왔다.
오십 년 수행 동안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다면 모른다는 것뿐이다. 격식, 체면, 권위가 아니라 얼마만 자기 마음을 비우고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그것 하나로 잣대를 삼는 게 수행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한다. 힘이 들어가면 틀 속에 갇히게 되고 틀 속에 갇히면 선입견에 눈이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이런 물음을 치열하게 물으면 몸과 마음의 힘이 자연스레 빠진다. 그러면 세상이 거울에 비추듯 나에게 비춰진다.
마음에서 힘을 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모른다. 그 알 수 없는 물음 속으로 끝없이 몰입하다 보면 자연히 힘이 빠진다. ‘안다’라는 생각이 모두 비워지면 내가 정말 ‘모른다’라는 생각만 오롯이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