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괜찮은 나이
어른들을 위한 《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나이 듦 수업’
오십 이후의 시기는 삶의 어느 단계보다 많은 성찰과 사색을 필요로 한다. 예전과 같지 않은 몸 상태, 깜빡깜빡하는 기억력, 점점 소원해지는 인간관계,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두려움... 나이 듦은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경험이면서, 기대와 흥분보다는 불안과 걱정이라는 사뭇 다른 정서를 자아낸다.
이 책은 나이 듦과 노년에 관한 헤르만 헤세의 글을 모아놓은 선집이다. 우아한 필치의 에세이와 시, 아포리즘이 서로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교향악처럼 펼쳐진다. 헤르만 헤세는 삶의 전환기를 예민하게 포착한 소설 〈데미안〉의 작가답게, 나이 듦에 수반하는 여러 현상들을 투명한 지성으로 응시한다. 작가 자신이 여든 살을 넘게 살면서 깊이 통찰한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가 산뜻한 에세이와 시로 제시된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변함없이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이유.
그것이 이 책 속에 듬뿍 담겨 있다.” _정여울(작가)
나이 드는 것에도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나이 듦’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신체적으로 쇠퇴하는 데다, 예전처럼 나이 그 자체로는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이 드는 것은 자주 우울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젊게 살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사실 헤세가 살던 시절의 서구도 비슷한 사회적 분위기였다. 독일도, 미국도 ‘젊은 숭배’가 유행처럼 번져갔다. 헤세는 그러한 시대 문화 속에서 여든이 넘게 장수했다. 자연히 그의 글쓰기 관심사로 ‘나이 든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 책은 헤세가 남긴 1만 4,000쪽에 달하는 전집과 3만 5,000장의 편지글 중에서 ‘나이 듦’과 ‘노년’을 주제로 한 에세이와 시를 모아놓은 것이다. 엮은이 폴커 미헬스는 〈헤르만 헤세 서간〉을 포함해 수많은 헤세의 저작을 편집/간행한 이 분야의 권위자로서, 이 책은 독일에서 1990년에 처음 발간된 이후 몇 번의 개정을 거쳐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독일 아마존 스테디셀러 최신 개정판
“풍부한 인생 경험에서 길어낸 원숙함” _장석주(시인)
대부분 학창시절에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접하고 감동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인간의 삶에는 ‘두 번째 방황’, ‘두 번째 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마음이 혼란스럽고 방황하는 시기가 오십 이전에 한 번은 더 찾아오기 때문이다.
“마흔 살과 쉰 살 사이의 십 년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에게는 언제나 힘겨운 세월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삶과 자기 자신을 적절히 조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종종 불만족에 시달리는 시기다. 그렇지만 그다음에는 편안한 시간이 다가온다.”(본문 중에서)
나이 듦과 성숙의 길목에서 다시 만나는 헤세, 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해줄까? 헤세는 딱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역시 ‘나이 듦’ 앞에서 여러 번 주저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러한 진솔함이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큰 울림을 준다. 헤세는 말한다. “나이 먹어가는 것과 성숙해가는 것에도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의 나이 듦에 대한 긍정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지혜를 준다.
추천의 말
*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어쩌면 괜찮은 나이》는 헤르만 헤세가 쓴 노년과 죽음에 대한 시와 에세이를 모아 엮은 책이다. 노년은 신체적 둔감함과 몸의 이완 속에서 겪는 낯설고 당혹스런 경험이다. 젊음의 활력과 쾌락에서 멀어진 사람들은 늘어진 피부, 동맥경화, 관절의 뻑뻑함, 기억의 유실과 망각들, 잦은 질병의 시기를 견뎌야 한다. 노년의 현실이 주는 환멸과 낙담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얇은 책은 그 지혜를 담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노년과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그윽한 성찰을 한 뒤 그 의미들을 하나하나 짚어낸다. 마침내 죽음의 고통마저도 탄생과 같이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긍정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대작가의 빼어난 문장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풍부한 인생 경험에서 길어낸 원숙함과 달관의 지혜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리라.
*정여울/작가
헤세와 우리 사이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살아온 환경도, 맞서야 할 운명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헤세에게 깊고 따스한 친밀감을 느낀다. 그것은 헤세가 그린 인간의 희로애락, 그중에서도 슬픔과 회한의 얼굴이 우리 자신의 그것과 꼭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헤세의 소설이나 시보다도 산문이 훨씬 친밀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여기에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 글 속의 ‘헤세’를 ‘나’로 바꿔 읽기만 하면 된다. 헤세 대신 ‘나’를 집어넣는 순간 우리는 오래 전 독일이나 스위스의 작은 마을, 호수와 언덕과 나무와 꽃들이 가득한 그림엽서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변함없이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이유. 그것이 이 책 속에 듬뿍 담겨 있다.
책 속에서
노인들은 젊은이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열정은 아름다운 것이고, 젊은이들은 대단하다. 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해학이 필요하다. 그것은 약간의 미소를 짓게 만들고, 심각하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하나의 그림 속에 담게 한다. 또한 그런 해학은 흘러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는 것처럼 사물을 관찰하게 한다._30~31
마흔 살과 쉰 살 사이의 십 년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에게는 언제나 힘겨운 세월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삶과 자기 자신을 적절히 조화시키기 어렵기 때문에 종종 불만족에 시달리는 시기다. 그렇지만 그다음에는 편안한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그것을 나 자신에게서만 느끼지 않았고, 다른 많은 사람에게서도 관찰할 수 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심한 가슴앓이를 하는 젊음이 아름다웠던 것처럼, 나이를 먹어가는 것과 성숙해가는 것에도 아름다움과 기쁨이 있다._65
나이 오십이 되면 사람들은 유아기적인 버릇이 차츰 없어진다. 명성과 존경을 받으려는 생각을 차츰 떨쳐내고, 아무런 열정 없이 자기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것을 배우게 되고, 침묵하는 것도 익히며, 귀 기울여 듣는 것도 배운다. 허약해지고 나약해지는 대신에 그런 좋은 것들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커다란 이득이다._68
나이 든다는 것은 단순히 망가지고 시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매 단계가 그렇듯이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독자적인 마법을 숨기고 있고, 특유의 지혜와 고유한 슬픔을 갖고 있다._102
지금, 노년의 정원에는 전에 우리가 미처 가꾸지 못한 많은 꽃송이들이 곱게 피어나고 있다. 고귀한 인내의 꽃이 만발하면 우리는 더 여유롭고 관대해질 것이다._134
비열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한 최고의 무기는 용기와 고집, 그리고 인내다. 용기는 강하게 만들고, 고집은 흥미롭게 하며, 인내는 휴식을 준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것을 대개 인생의 늘그막에 알게 된다. 풍파에 시달릴 때와 죽음에 서서히 다가갈 때도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필요로 한다._148
품위 있게 늙어가고, 우리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것, 지혜를 갖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영혼이 육신에 앞서거나 뒤쳐져 있기 쉽다._151
사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란 없다. 모두 예전에 적당한 크기로 이미 경험했던 것들이다. 점점 더 희귀해지는 ‘새로운’ 경험은 그동안 수차례 있었던 경험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미 오래전에 다 완성되었던 것처럼 보이는 화폭에서, 옛 경험이라는 수십 혹은 수백 겹의 실체 위로 새롭고 연한 색깔을 덧칠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그것은 새롭고 진정한 경험이다. 비록 원초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여러 가지 면을 종합해볼 때 자기 자신과의 만남, 자신에 대한 시험이 되기 때문이다._237
죽음은 우연도 아니고, 무의미하지도 않으며, 잔인한 것도 아니다. 죽은 사람을 악이 데리고 간 것도 아니고, 다만 그의 삶에 주어진 과제를 끝마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형상을 다시 얻고, 계속 영향을 미치기 위해 간다. “그의 삶에 주어진 과제가 끝났다”라는 말의 의미는 그가 귀중한 일을 앞으로 더 오랫동안 할 수 없었을 거라든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사람 자신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의미에 도달했고 성숙했다는 뜻이다._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