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전
스물네 개의 연장,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의 연장전
노동운동가 박점규와 사진가 노순택이 스물네 개의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을 만나 이 땅의 노동 현실을 기록한 《연장전》이 출간되었다. 노동자의 ‘연장’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 노동의 풍경을 가감 없이 그려냈다.
스물네 개의 일터에서 진짜 노동을 목격하다
노동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연장을 갖고 있다. 연장에는 노동하는 사람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수십 년 망치를 손에 들고 집을 지어온 목수, 현란한 솜씨로 다양한 칼을 써서 생선회를 치는 일식요리사, 호스피스 병원에서 환자들의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 주사기를 드는 간호사. 노동운동가 박점규와 사진가 노순택은 노동에 대한 기획을 시작하면서 바로 그 ‘연장’을 떠올렸다. 박점규는 “밥벌이 수단이자 노동자의 분신인 연장에 주목해 직업의 명암과 노동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자 이 기획을 시작했다. 그는 통계청 직업분류표에서 스물네 개의 직업을 고르고, 스물네 곳의 현장에 찾아가 노동자들의 진짜 목소리를 기록했다. 노순택은 연장이 작동하는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해 노동의 풍경을 담아냈다. 미용사가 몇 번의 가위질로 스타일을 창조해내는 순간, 대형 선박에서 완벽한 용접을 해내는 베테랑 용접사의 모습. 그러나 《연장전》의 연장들이 직업적 특성이나 숙련된 기술만 선보이는 건 아니다. “고용의 차별이 안전의 차별, 생명의 차별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연장은 이 시대를 사는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증거로 기능하기도 한다.
한국사회를 괴물로 만든 비정규직 노동의 진풍경
2017년 대한민국 비정규직은 1110만이다. 이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 둘 중 하나는 정규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는 비정규직인 셈이다. “비정규직 노동, 오늘날 한국사회를 괴물로 만든 이 야비한 노동의 형태에 주목하기로” 한 노순택과 박점규는 비정규직 일터를 찾아다니며 이 책을 완성했다. 취재 약속은 자주 불발되었고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연장전》에 등장하는 스물네 개의 노동 현장에는 그들이 목격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겼다.
칼판 위에서 망치를 두드리고 한 땀 한 땀 꿰매 완성한 수제화. 유명브랜드를 달고 27만 원에 판매되는 이 구두를 만든 장인은 얼마를 가져갈까. 고작 만이천 원이다. 40년 구두 장인의 시급이 5천 원도 안 되는 셈이다. 백화점에 걸릴 신상 여성복을 만들어내는 특1급 재봉사의 현실은 어떨까. 신의 솜씨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고급 코트를 뚝딱 만들어내지만 10시간 일하고 그가 받는 돈은 고작 7만 5천 원이다. 우리나라 집배원의 1인당 담당 인구는 일본의 네 배가 넘고 택배기사는 20킬로그램이 넘는 물건을 배달하고 고작 라면 한 개 값을 받기도 한다. 수십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아파트를 지어올린 굴삭기 기사는 여전히 쪽방촌 신세고, 한평생 집 짓는 귀한 일을 해온 목수는 노가다라고 천대받는다. 고된 현실은 현재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성수동 제화의 거리 막내는 쉰 살, 고급스웨터 공장의 막내는 예순다섯 살이다. “8500원 받는 극장 알바”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노동에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살 만한 나라를 넘어 일할 만한 나라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을 과연 법과 제도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수영장에서 사고가 나면 안전요원이 욕을 먹고, 어린이집 학대 사건에서 교사는 악마로 매도되지만, 부족한 인력과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동’은 오랫동안 무관심과 외면의 대상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는 왠지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는 누명을 쓰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회사원으로 불리고 싶어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동조합을 이익집단으로 매도하고 노동자의 목소리를 폭력으로 묵살하는 나라. 구의역 사고와 콜센터 여고생 사망 사건이 잠시 관심을 끌 뿐, 지하철 정비사와 콜센터 상담원은 여전히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연대’의 순간은 더욱 눈물겹다. 일자리를 지키려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싸움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지키려는 바깥의 싸움을 통해 《연장전》은 희망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파업으로 맞서고 임금 동결을 감내해 비정규직 없는 공장을 일궈낸 대한이연 노동자들, 건설 노동조합에 가입해 지역을 근거지로 일하며 임금 안정을 이룬 안산지회 건설 노동자들. 해고노동자 주점에서 요리하는 셰프와 해고노동자를 위한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
이 책에 등장하는 호텔 일식요리사 고진수 씨는 지난 4월 14일 광화문광장 사거리의 40미터 광고탑에 올라갔다. 비정규직 일터의 현실을 알리고자 삭발을 하고 단식까지 했다. 인기직종으로 각광받는다는 요리사지만, 대다수가 하루 10시간 주6일 노동을 하고도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그가 내려다본 거리는 촛불의 힘으로 불의한 권력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되찾은 바로 그곳이었다. 수천수백 만의 국민이 한 마음으로 ‘살 만한 나라’를 부르짖었던 바로 그 거리. ‘살 만한 나라’만큼 ‘일할 만한 일터’도 소중하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민주사회를 위한 투쟁을 넘어 또 다른 싸움을 응원하며, 이제 《연장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