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황금강의 왕〉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저명한 저술가이자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이 쓴 유일한 동화다.
그는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휴학하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전전했다. 사경을 넘나들며 힘든 투병 시기를 거쳤는데, 당시만 해도 폐결핵은 걸리면 많은 이들이 사망하는 중병이었다.
신병의 고통으로 깊은 우울에 빠져 백약이 무효였던 젊은 러스킨은 그 시절 우연히 이웃의 딸인 열두 살 소녀를 만났다. 순수하고 발랄한 12살 소녀 에피 그레이의 밝고 깜찍한 미소는 깊은 우울에 빠져 있던 청년 러스킨에게 새로운 활력과 영감을 주었고, 삶의 의욕을 자극했다. 그 어린 소녀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이야기가 바로 이 〈황금강의 왕〉이라는 아름답고 유쾌한 동화다.
이 인연으로 에피는 7년 후 러스킨과 결혼하게 된다. 그 동안 그녀는 이 동화 원고를 친구에게 주었다. 이 작품이 쓰여진 후 9년째가 되었을 때 그 친구는 러스킨의 허락을 받아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황금강의 왕〉은 1851년 런던에서 유명한 리처드 도일(Richard Doyle)의 삽화와 함께 출판되었으며, 단번에 인기를 끌었다. 첫 해에만 세 가지 판본이 인쇄되었고, 곧 독일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로 번역되었다.
저자소개
- J. 러스킨
〈황금강의 왕〉을 쓴 존 러스킨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중요한 예술 평론가이자 후원가, 소묘 화가, 수채화가,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독지가이다. 그는 지질학부터 건축, 신화, 조류학, 문학, 교육, 원예와 경제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글을 썼다.
러스킨은 1819년 2월 8일 런던 브룬스윅 스퀘어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셰리 와인 수입업자였고, 모친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의 부친은 무능한 사업가였던 조부가 남긴 막대한 빚을 갚느라 동분서주했으므로, 어린 시절 러스킨의 가정 환경은 경제적으로 썩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생활력과 책임감이 무척 강하여 마침내 물려받은 빚을 모두 청산했고, 아들의 교육을 위해 부부는 가능한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
복음주의 크리스챤이던 어머니는 어린 시절 러스킨과 함께 늘 성경을 읽었고, 부친은 셰익스피어, 바이런, 월터 스콧 같은 영국의 유명한 문인들에 대해 아들과 함께 깊은 관심을 공유했다고 한다. 또한 가족과 함께 어린 시절 유럽 여행을 하면서 받은 깊은 인상이 훗날 러스킨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는 특히 알프스에 매료되었고, 일생동안 알프스에 대한 사랑을 품고 살았다. 또한 로마 시대 이래 무수한 고대, 중세 화려한 예술 작품과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큰 자극과 깊은 감명을 받았다.
러스킨은 유년기에는 친구도, 장난감도 없는 가난한 생활이었다고 회상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부모와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후 1834년부터 1835년까지 진보적 복음주의자 토머스 데일(1797년 ~ 1870년)이 운영한 페컴에 위치한 학교에 다니게 된다. 1836년 영문학 정교수이던 데일이 런던 킹스 컬리지에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을 들은 그는 킹스 칼리지 런던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하며 데일의 지도를 받다가, 옥스퍼드 대학교로 진학하여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화가 터너의 그림을 변호하려고 한 것이 동기가 되어, 1860년 〈근대 화가론〉을 완성함으로써 크게 주목을 끌었다. 이 〈근대 화가론(Modern Painters)〉은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843년부터 1860년까지 그의 인생 중반기 왕성한 사색을 담은 유명한 저작이다.
이 저서의 3부에서 러스킨은 모든 위대한 예술은 "위대한 이의 영혼의 표현"이라 주장했다. 또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오직 도덕적이며 영혼의 건강함만이 고귀하며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라 지적하며,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관통하는 상상력으로서 숭고함과 미를 위대한 예술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관심은 예술을 비롯하여 문학, 자연과학(지질학과 조류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었으며, 작가이자 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 한편, 당대의 어두운 사회경제적 모순을 목격하고 불혹의 나이에 사회사상가로 변모하기도 했다. 이후 점차 사회 비평에 눈을 돌려 인간 정신의 개조에 의한 사회 개량을 주장했으고, 미술 방면에서 거의 최고의 권위를 차지하였다. 이후에는 경제 및 도덕 방면에서 존경받았다.
이처럼 러스킨은 저술과 회화 작품을 통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당대 예술평단의 일인자로 전세계에 명성을 떨쳤다. 러시아 최고의 문호로 일컫는 톨스토이는 러스킨의 저서를 읽고 “영국과 우리 세대뿐 만 아니라, 전 세계와 모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이 중 하나”라고 표현했으며, 러스킨의 사상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소개하며 그의 주장 상당수를 인용했다. 또한 인도의 성인이라 불리는 간디, 프랑스 작가 푸르스트, 버나드 쇼 등도 러스킨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며, '당대 최고의 사회 개혁자' 라고 평했다.
러스킨은 만 50세가 되던 1869년 8월, 옥스퍼드 대학에 재직중인 친구 헨리 어클란드의 주선으로 만장일치로 옥스퍼드 대학 미술 슬레이드 교수에 임명되었다. 또 1871년 그의 51번째 생일날 셸더니언 극장에서 기대보다 더 많은 청중들에게 첫 강연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어느 나라의 예술이건 그것은 그 나라의 사회적, 정치적인 미덕들을 설명해준다”라고 말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 〈근대화가론〉, 〈베네치아의 돌〉 등의 예술비평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비롯한 경제학 저술, 〈참깨와 백합〉, 〈티끌의 윤리학〉 등의 대중강연집이 있다.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뛰어난 비평가이자 작가, 사회개혁가로 명성을 떨친 러스킨은 1900년 1월 20일, 영국 브렌트우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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