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블랑슈
소녀 블랑슈는 천진난만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탐욕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블랑슈를 포함해 악인열전을 펼치듯 대부분이 빌런이다. 넘치는 건 욕심인데 사리분별은 모자란 아버지, 어린 블랑슈를 아내로 맞아서 학대하고 착취하는 프라비, 여기에 악인의 것을 빼앗으려는 역시나 악한 공모자들. 이 작품은 고딕 소설에서 자주 활용하는 인간의 탐욕과 음습하고 낡은 성을 효과적으로 결합한 뒤 당대 지배적인 여성상(현모양처 형)과는 사뭇 다른 빌런 형 여성을 등장시키는 등 매력적인 변주를 선보이고 있다.
〈책 속에서〉
전쟁과 정치에 신물이 난 기욤 드 프라비는 아내를 얻어 재산을 불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떡 벌어진 어깨에 털북숭이 가슴의 건장한 남자였다. 무장한 무사 둘을 양손에 한 명씩 움켜잡아서 제압할 정도였다.
그는 각반을 차고 자기 땅을 돌아다니면서, 묵직한 손으로 밭고랑에 웅크리고 있는 진흙투성이 인부들의 등짝을 후려치곤 했다.
그의 너부죽한 얼굴은 항상 관자놀이에서 맥박 치는 피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기를 먹을 때는 뼈까지 으깨 먹었다.
어느 날 그는 랭스(프랑스 북동부의 도시?옮긴이) 인근에 있는 자신의 목초지를 말을 타고 가다가 로베르 도베르브뢰 소유의 들판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저택의 커다란 홀로 들어갔다. 벽을 따라 줄느런한 궤짝들이 허름해 보였는데, 궤짝 하나하나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큼지막했다. 식탁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고, 불을 때는 도구들은 녹슬어 있었고 고기를 굽는 쇠꼬챙이에는 먼지가 수북이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구두 수선공의 앞치마와 송곳, 다듬 망치들이 눈에 띄었다. 거친 리넨 셔츠를 꿰매 입은 남자 하나가 구석에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안색이 창백하고 금발이 부스스한 여자 아이가 벽난로의 재받이돌에 쪼그리고 앉아서 놀란 표정으로 빤히 구석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기욤 드 프라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평한 가슴과 앙상한 팔다리, 조막만 한 손. 나이는 열 살이 됨직했다. 그러나 입은 여자 티가 났는데, 창백한 얼굴을 붉은 상처처럼 갈라놓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