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자화상
추사의 시서화 · 호(號)가 한없는 깊이와 재미가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적 대우법에서 얻는 상대적 우위와 은유적 역설법으로 만들어내는 반전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①시적 대우법은 상반되는 것을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성괴(醒怪)와 취괴(醉怪)가 그것이다. ②은유적 역설법은 직접 말할 수 없는 것을 은유적으로 모순되게 말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법이다. 추사가 난을 치고 시를 지어 써놓고, “만일에 누가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역시 또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살던 유마거사의 무언(無言)으로 거절하겠다.”고 한 말은, 부처가 팔만사천법문을 말해놓고도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不說一字)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만필(漫筆)이나 희작(?作)이라고 쓴 관지도 역시 역설적 표현이다. 그렇게 추사의 예술작품은 거꾸로 보거나 뒤집어 반대로 보아야 보이는 반전미(反轉美)가 있어서 거죽만 보는 감상자를 헛다리 짚게 한다. 표현법을 중심으로 보면, 추사의 예술은 함축적 반전예술(反轉藝術)이다.
예술가에게 철학은 예술 행위의 대전제가 된다. 그래서 예술가가 취한 예술철학으로 그의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버렸다면, 그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추사의 예술철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청장년기의 추사는 그의 예술철학적 기초를 유불도(儒佛道) 철학에 두었다. ② 그는 십연천호(十硯千毫)의 노력으로, 육경 속에서는 육경구시필(六經求是筆)을 꺼냈고, 『유마경』 속에서는 유마의 불이필(不二筆)을 꺼냈으며, 『장자』 속에서는 천유필(天遊筆)을 꺼냈다. 육경의 육경구시필, 유마의 불이필, 장자의 천유필은 추사 자신의 천기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그것은 추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그에게는 하나의 도작(徒作)에 불과한 것이었다. ③ 추사는 일생 동안 필법을 세 번 바꾸었는데, 그의 필법삼변(筆法三變)은 다음과 같다. 제1기는 30?63세의 효법기(效法期)이다. 그것은 31세에 〈실사구시설〉에서 고법에 충실히 하는 육경구시(六經求是)를 주장할 때부터이다. 제2기는 64?67세의 탈법기(脫法期)이다. 그것은 64?66세 무렵 〈유희삼매〉 작품에서 탈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 때부터이고, 성괴(醒怪)와 취괴(醉怪)를 구분할 때부터이다. 제3기는 67?71세의 입법기(立法期)이다. 그것은 67세(1852년 10월)에 과천으로 돌아온 이후 필법 바깥에서 털끝만큼의 기교도 없이 〈퇴촌(退村)〉을 쓴 때부터이다. 하지만 제2기와 제3기는 불이필(不二筆) · 천유필(天遊筆) · 천기필의 필법이 혼재하는 시기이므로 분명하게 둘로 나누기는 어렵다. 소위 추사체는 제3기의 작품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④ 청년기의 추사에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의미가 육경구시(六經求是)이었다면, 노년기의 추사에게는 천기구시(天機求是)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상적 목표는 오직 초발직심의 천기필(天機筆)로 성중천(性中天)의 진상을 필법 바깥에서 털끝만큼의 기교도 없이 표현하는 것이었다. ⑤ 추사는 예술철학의 이상적 목표로 시서화선도동일묘경(詩書畵禪道同一妙境)을 추구했지만, 방법적으로 유여부진(有餘不盡)을 추구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시서화는 천기를 표현하기 위해 불영미제(不盈未濟)의 자연미(自然美)를 추구한 괴미예술(怪美藝術)이 되었다. 추사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예술철학을 건립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천기필로 성중천(性中天)의 진상을 그렸으므로 자아사출주의(自我寫出主義), 또는 천기사출주의(天機寫出主義)의 예술철학이 되었다. ⑥ 그래서 추사의 과천 시절 시서화는 자신의 자화상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