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자비
미국으로 이주한 러시아인의 아들 세르게이는 어머니가 자살한 후 바바라는 다른 러시아인 여자의 손에 자란다. 그리고 열두 살 때 먹여주고 입혀주는 조건으로 이번에는 늙은 농부의 집으로 팔려간다. 어렸을 때부터 되풀이되는 혹사와 학대 그래도 그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개 한 마리에 큰 애정을 느끼게 되면서 긍정적인 마음까지 든다. 유일하게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 같은 마투쉬카(개)와 주위에서 들은 위대한 "국가"가 그를 도와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그를 지탱한다. 이런 더부살이가 어느새 7년 째, 그런데 이 개 때문에(실상 세르게의 삶 자체가 개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늙은 농부를 죽이고 법정에 서는 기구한 운명을 맞는다. 이제 그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추상적인 대상이지만 반드시 그를 도와주러 올 거라 믿는 "국가"를 기다리며 처참한 고문과 수형 생활을 견디어간다. 이 작품의 제목 법정의 자비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된 것을 의미하지만 과연 이것이 자비일까? 러시아의 엄혹하고 괴로운 삶보다 과연 이 기회의 나라 미국의 삶은 세르게이에게 더 나은 것일까? 끝까지 놓지 않는 세르게이의 희망, 독자에게는 공포와 절망으로 읽히는 것 같다.
〈책 속에서〉
“망할 자식! 이걸 테메운(테메우기는 나무통 따위의 둘레를 대오리, 편철, 철사 등으로 돌려 감는 것을 말함?옮긴이)거라고 주는 거냐?”
세르게이 포볼리치키는 일에 찌든 큼지막한 두 손을 마주잡고 아무 말이 없었다. 교도관은 변함없이 개처럼 무력한 세르게이의 침묵에 울화가 치밀어 다시 다그치기 시작했다.
“이게 뭐냐고 내가 묻지 않았나? 네 놈이 우리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일을 하기에는 너무 잘나셨다 이거지. 두고 보자.”
세르게이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쉰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빗자루라면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많이 해봤거든요.”
“오호, 그러셔? 그래서 지금은 안 하겠다 이거야? 두고 보자. 테메우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학교에 보내주지. 네 놈도 알거다. 여기에 아담하고 어두운 야간 학교가 있다는 거. 아주 많은 걸 가르쳐주는 곳이지.”
애원하듯 교도관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세르게이의 눈썹이 겁에 질려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도관은 계속 다그쳤다.
“지금부터 여기 앉아서 네 놈이 저 통들을 어떻게 테메우나 지켜보겠어. 제대로 못하면 교도소장에게 보고한 뒤에 네 놈을 밧줄을 걸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매달아주겠다.”
세르게이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교도관이 보고 있지 않았으면 했다. 교도관이 보고 있다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테메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땅을 가는 일밖에는 한 적이 없고, 테메우는 일이 서툴러서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교도관의 욕설에 몸이 떨려서 망치를 잡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어두운 독방을 무척 무서워했다. 그의 감방은 독방 바로 옆에 있었는데, 밤마다 고통이 심해질 때면 사람들이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교도관에게 물을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불쌍한 친구 하나는 밧줄이 엉켜 숨이 막히자 정신이 혼미해져서는 밤새 거기 없는 어머니를 향해 아프니까 그렇게 세게 껴안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