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좌회전 신호가 저녁까지 길다

좌회전 신호가 저녁까지 길다

저자
심응식
출판사
현대시학사
출판일
2023-11-22
등록일
2024-01-23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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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그동안 여러 번 가보았지만 그새 한들마을의 새로 지은 아파트가 궁금해 집을 나섰다. 적당히 차를 세우고 단지를 서성이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게릴라성 집중호우라 할 만하였다. 게릴라도 그렇지만 소나기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허둥지둥 상가계단으로 비를 피하기는 했지만 온몸이 젖었다. 오래 전 한들마을 소나기가 떠올랐다. 지금이야 추수하면 곧바로 최상의 습도가 될 때까지 건조기에 넣어 말리지만 그 시절에는 볕에 널어 말렸다. 이럴 때 오늘처럼 소나기 내리면 나락멍석은 꼼짝없이 비를 맞았다. 삼사일 내로 말리지 못하면 싹이 돋았다. 이런 벼는 정미하는 과정에 모두 싸라기가 되었다. 가을비는 할아버지 수염 밑에서도 피해간다고 하지만 가을걷이할 때 소나기 냄새 밀려오면 온 집안 식구는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비 쏟아져도 아파트는 조용히 비 맞을 뿐 비 때문에 허둥대는 사람이 없다. 비설거지 할 필요 없어 좋겠다 싶었다. 젖을 콩단도, 줄지어 세워놓은 볏가리도 없으니 말이다.

비 멎기 기다리며 지워져가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했다. 간장 달이는 냄새, 장독대 너머 아주까리 대, 담장 아래 핀 꽃들, 추녀 아래 제비집, 상엿소리 같은 구석구석 눈에 선하고 혀끝에 익숙해진 그 품에서 나는 나이 들었다.

세상이 변해가듯 인연은 언젠가 떠나고 남은 기억도 지워지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빈자리에는 새로운 인연이 동행하겠지만 내게 남은 빈자리는 없다. 그것은 지워야 할 기억들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저 흔적도 없이 잃는다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남은 생은 공황장애를 앓을 것 같다.



2023년 가을

심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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