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의 나침반
〈 프롤로그 〉
2024년 51살이 된 지금 나는 삶을 돌이켜보았다. 살아오면서 많은 희로애락이 있었다. 불우한 유년기와 아동기 청소년기를 지나오면서 극복하고 견뎌내는 일에는 이골이 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불안정한 가정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유의 긍정적인 태도와 미소가 빛나는 아이였고 힘든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못하고 바로 사회인으로 취업을 해야 했다. 왜냐햐면 그리 넉넉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소녀가장이 되어 세 살 아래인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철이 빨리 들어야만 했고 조숙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의한 빠른 성숙에 회의감이나 고통을 토로할 수도 없었던 내 삶은 그때부터 받아들이기를 잘하며 수용능력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ㆍ
선택지가 없었던 나의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당연히 암울했으며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블랙홀의 중심에 들어 온 듯 늘 안타까웠고 불안했으며 방황했고 아파했던 날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책임져야 할 동생이 있었다는 것은 삶의 끈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마다 동아줄이 되어 주는 안정망이었다ㆍ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ㆍ 적은 월급을 타면 월세를 내야 했고 동생 교복을 맞춰 주어야 했고 동생 용돈과 우리들의 생활비로 빠듯한 살림을 꾸려 나가면서도 내 동생이 학교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기를 바랐다ㆍ
아빠는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돌아 가셨고 엄마는 아빠와 헤어지신 후 연락이 두절 되셨으며 힘든 시골 생활에도 억척스럽게 자매를 길러 내시던 할머니의 뇌출혈로 인한 사망으로 나는 그렇게 소녀가장이 되었다ㆍ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기에 수만 번 수천 번 좌절했고 소녀가장이라고 군에서 정부미라도 가져가라는 날에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ㆍ 그러나 또 어찌 하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는 살아야 했다ㆍ
그래서 쌀을 리어카에 싣고 오는 날에는 동생이랑 더 크게 웃으며 장난을 치며 오곤 했다ㆍ 우리 자매는 어릴 때부터 단둘이라서 친구 같고 형제 같고 또한 서로의 보호자였다ㆍ그래서인지 둘이만 있다면 그 어디에서든 늘 든든했고 애틋했다ㆍ물론 티격태격 싸운 날들도 허다하다ㆍ 그러면서 또 정이 더 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진한 전우애도 생겼다ㆍ
고등학교 졸업 후 난 당연히 동생 뒷바라지를 했다ㆍ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고 용돈이며 옷이며 음식이며 살뜰히 챙기며 보살폈다ㆍ그러나 나와는 다르게 왈가닥 같았던 씩씩한 동생은 남자애들과 어울렸고 학교를 안가고 아이들과 탈선을 하는 사태로 직장에 있는 내게 경찰서라고 연락이 오고 조퇴를 하고 달려가서 보면 예닐곱 되는 아이들과 같이 잡혀온 채로 상담을 한 후 각자의 집으로 보내졌다ㆍ 그때의 놀람과 두려움과 불안감은 글로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몇 번의 탈선과 비행에 급기야 담임선생님은 자퇴를 권유했다. 어떻게든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게 하고픈 나의 꿈은 자퇴 권유서에 싸인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졌다ㆍ 동생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운동장을 지나 교정을 나오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탓인가 내가 이 아이를 잘 품어주지 못해서였을까 하며 자책했다. 그때는 나보다 동생이 더 씩씩했다.
나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깊은 슬픔이었는데 동생은 의외로 담담했다. 내가 옆에 있어서였을까? 사회 생활을 시작한 동생은 생각보다 잘 견뎌내주었고 늘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협력자로 항상 내 곁에서 함께 했었다.
그러다 내 인생의 험난하고 힘든 삶의 무게를 나누고픈 사람을 만났다. 지금의 남편이자 애들 아빠였다. 그렇게 나의 아름다운 희로애락은 시작이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내가 나를 치유하고 싶어서 치유에세이를 쓴다. 문 열고 들어가면 집집마다 사연이 있듯이 내게도 그런 사연이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다 감사하고 고마운 나의 인생아~ 덕분에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힐링강사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