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아킨토스
고블 씬북 아홉 번째 작품.
SF 어워드 장편 우수상 수상 작가
박애진이 선보이는 우주 시대 귀족들의 인공지능을 둘러싼 권력 암투극.
박애진의 『히아킨토스』는 그동안 ‘작지만 강고한 이야기’를 표방해온 고블 씬북에서 소개해온 책 중 가장 두툼한 두께를 가진 경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전설적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우주 개척 시대의 이야기로 다시 그려낸 듯한 배경 속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성에 대한 사유를 깊이 녹여냈다.
왕정 시절의 귀족 사회를 바탕으로 하는 행성, 귀족에게 범죄를 가한 혐의로 붙잡힌 로봇 ‘제로델’. 제로델은 수감되어 폐기 되어야 할 처지에 이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제로델의 편을 드는 등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고 마는데. 사건을 조사하던 신부 ‘카이유와’는 이 행성에서 벌어진 균열과 대립을 바라보며 오래전 참전했던 고향 행성의 전쟁을 떠올린다.
사랑인가, 학습된 반응인가. 추방인가, 폐기인가.
귀족 사회에 깊이 침투한 로봇 ‘제로델’을 둘러싼 암투와 욕망.
제로델은 유르베에서는 최초로 로봇으로서 시민권을 받았고, 중세 왕정 분위기를 내기 위해 만들었던 감옥에 갇히는 첫 번째 시민이 되었다.
-26쪽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 로봇이 인격체인지 아닌지를 판명하는 소설은 지금 시대에 이르러서는 너무 클래식하다고 여길 SF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소재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따라 클래식한 소재는 그저 고전적인 것이 아닌 특수한 소재가 된다.『히아킨토스』는 독특한 배경 속에 문제적 등장인물들을 등장시켜 클래식한 소재를 정면으로 돌파해나간다.
‘유르베’는 마치 빅토리아 시절 왕정과 귀족 사회의 풍경을 재현해놓은 듯한 소설이다. 대개 SF 콘텐츠는 우주 개척 시대임에도 왕정 시대로 회귀한 설정을 차용할 때, 저마다의 이유를 지니고 있다. 인공지능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문명이 파괴되어 제국의 환경을 갖추었다든지, 다른 문명과의 오랜 단절 때문에 정치 시스템이 후퇴했다든지 등등. 『히아킨토스』의 행성 ‘유르베’는 독특하게도 너무나 많은 풍요와 평화 때문에 왕정이 정착되었다는 설정이다. 풍부한 자원을 갖춘 시민들이 역할극으로 즐기던 귀족 놀이가 진짜 정치 환경으로 구축된 것이다.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귀족정. 그러나 누구에게도 과한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느슨하고 평화만이 가득한, 동시에 많은 이들이 욕망이 실현되기도 하는 사회. 유르베는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곳이다. 하지만 이 유르베 또한 로봇 제로델의 파괴하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두 분파가 갈등하게 된다.
이때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카이유와’가 등장한다. 어두운 과거를 뒤로 하고 유르베에 정착해 신부가 된 그는 유르베 사회 속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며, 제로델과 얽힌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듣는다. 그리고 유르베 사회에 속한 인물들이 각종 트라우마와 딜레마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제로델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매개가 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르베에서 벌어진 갈등은 단순히 제로델만이 가져온 것이 아닌, 이 사회 곳곳에 뿌려진 불합리에 의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카이유와는 이 행성에서 벌어진 갈등을 보며, 자신이 참전했던 고향 행성의 전쟁을 반추하는데.
『히아킨토스』는 유르베의 환경에 깊이 침투한 제로델의 존재 양태에 관한 질문도 빼놓지 않는다. 걷잡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로봇 제로델. 그 자신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정의하고 있을까? 제로델에게 씌여진 범죄 혐의는 혐의에 불과한가? 만약 제로델이 그토록 완벽한 존재라면 그가 중심축이 된 이 행성의 갈등은 어디서 오는가? 이 소설은 전개될수록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의식들로 독자들을 휘어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