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청춘은 아름다워: 시간 속에 피어난 젊음의 초상
1916년 출간된 『청춘은 아름다워(Sch?n ist die Jugend)』는 20세기 독일 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청춘기를 되돌아보며 쓴 자전적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젊음의 생동감 넘치는 순간들을 포착하는 동시에, 그 순간들의 덧없음을 성찰하는 서정적 산문이다.
작품은 수년간의 방랑 끝에 '의젓한 청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화자 '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가을부터 외국에서 일할 직장을 앞두고 여름 휴가차 귀향한 주인공은 가족들과 재회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친척들을 방문하고 고향의 산천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그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두 여인과의 만남이 자리 잡고 있다. 여동생 로테의 친구이자 어린 시절 사랑했던 헬레네 쿠르츠는 주인공의 가슴 한켠에 자리 잡은 첫사랑이다. 그러나 그녀의 약혼 소식은 주인공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준다. 한편 로테의 또 다른 친구인 안나 암베르크는 주인공과 삶과 문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특별한 친구가 된다. 안나는 그를 자연스럽고 정다운 태도로 대하며,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작품이 쓰여진 1916년이 헤세의 삶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죽음, 결혼 생활의 파탄, 아내의 병환, 막내아들의 질병과 같은 개인적 시련을 겪으며, 그는 융의 제자인 J.B. 랑과 함께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청춘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섬세한 필치로 되살려냈다.
헤세가 여동생 아델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처럼 너 역시 '청춘은 아름다워'를 가장 사랑하게 될 거야. 부모님 집을, 그리운 고향을, 그 시절 우리의 청춘을 정말로 충실하게 지켜내고 묘사했거든"이라고 썼듯이, 이 작품은 작가의 내면이 가장 진실되게 투영된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훗날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황야의 이리』와 같은 걸작들의 모태가 되었으며, 전 세계 젊은 독자들이 탐독하는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고향과 가족, 첫사랑, 우정이라는 보편적 모티프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과 성장통을 섬세하게 포착해낸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청춘의 본질적 가치를 성찰하게 한다. 작품 속에 담긴 사랑과 자유의 추구,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기쁨과 후회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전한다.
저자소개
헤르만 헤세
Hermann Karl Hesse
1877년 7월 2일 ~ 1962년 8월 9일)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며, 시인, 소설가, 화가이다
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시인의 고장 슈바벤 주의 뷔르템베르크 소재 소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선교사이던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와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1842-1902)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 남편을 잃고 자신의 아버지 제자로 있던 요하네스 헤세와 32세 때에 재혼하였는데, 그녀가 5살 연상이었다. 요하네스 헤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 선교사였고, 외삼촌 빌헬름 트는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가로 불교연구의 권위자였다. 이러한 환경은 헤세가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머니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고 헤세의 형제로는 누나 아델레(1875-1949), 남동생 파울 (1878-1878), 여동생 게르트루트(1879-1880), 여동생 마리(1880-1953) 그리고 남동생 한스(1882-1935)가 있다.[1] 1881년-1886년 양친과 함께 바젤로 이사하여 거주했다. 1883년 아버지가 스위스 국적을 얻었으며, 1886년 (9세) 다시 칼프로 돌아갔다.
1880년까지 실업학교에 다녔으며, 1890년 신학교 시험 준비를 위해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 신학자를 위한 첫 관문 통과했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국적을 얻었다. 1891년 14세 때인 1891년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6월에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를 해서 정신요양원 생활을 했다.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을 했는데,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1893년 10월 학업을 중단했다.
서점원을 이틀만에 그만 두고, 1894년-1895년 시계부품공장 견습공으로 일했다. 2년간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 산문집 한 밤중의 한시간 발간. 가을에 바젤의 서점으로 옮겼다. 1901년 처음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 1902년 어머니가 사망했다.
1904년 『페터 카멘친트(향수)』를 통해 헤세는 일약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며, 이후 그는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할 즈음에 『페터 카멘친트』는 6만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전주의적 태도로 극우파들의 애국주의에 반대했다가 독일에서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돌출된 행동은 당시 지식인들이 전쟁을 비판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을 지지하고 다른 민족에 대한 미움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극우성을 보이는 것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를 보면서 환멸을 느꼈지만, 아시아 여행경험(1911년)으로 느낀 사해동포주의도 그의 애국주의 반대집필의 배경이 되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데미안』이다. 이 소설은 그가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 중 하나이다.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인쇄에 필요한 종이가 배당되지 않게 한 나치의 탄압을 받았다.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의 대표적인 전기 중의 하나는 1927년 위고 발(Hugo Ball)이 써낸 전기인데, 그는 헤세를 "찬란한 낭만주의 대열의 마지막 기사(騎士)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