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역사 다이제스트 시리즈 4)
임진왜란 (역사 다이제스트 시리즈 4) <역사 다이제스트 시리즈> 그때 그것이 알고 싶다! 다이제스트(요약)판 프로제트...짧을수록 내용의 깊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가볍게 ... 때로는 진지하게 ... 역사를 바르게 알아가는 재미! 도요토미는 교섭이 결렬되자 곧 원정군을 편성, 1592년(선조 25)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범케 하였다.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뒤따라 들어온 가토·구로다(黑田長致)·시마즈(島津義弘)·고바야가와 등과 합세, 삼로(三路)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고니시를 대장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가 인솔하여 울산·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 서울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였다.한편 구키·도오도오가 거느린 9천여 명의 수군(水軍)은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케 하였다. 왜병침입의 급보를 들은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일본군의 진로를 막게 하였으나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하였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背水)의 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하여 죽었다.신립의 패보는 서울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서울을 떠나 개성·평양방면으로 향하고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는 이미 민심이 정부에서 이반되어 모병에 응하는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가 피난가는 길을 막고 욕하는 자까지 있었다. 왕이 서울을 나왔을 때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 때문에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고니시의 군대는 충주·여주·양근을 거쳐 5월 2일에는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本據)로 하고 다시 2군으로 나누어 가토는 함경도로, 고니시는 평안도로 북상진군하여 평양을 위협하였다.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난하고 고니시군은 6월에 평양을 점령하였고 가토는 함경도로 북진하여 해상방면에 있어서는 처음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이 패전하였다. 이로 인해 적을 상륙시키고 많은 함선을 상실하였으나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적은 해상활동이 차단되고 보급로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