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이5
[책소개]
인류멸종프로젝트 개정판
강자들이 원하지 않은 충격적인 종말
살처분의 시대, 인간세상을 살처분하라!
4대강, 구제역 그 훗날을 가늠하는 충격소설
죽여야 하는 자에게 살殺은 생生이었고, 죽어야 하는 자에게 생은 살보다 참담했다.
Solitaire ou Solidaire? 고독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연대를 선택할 것인가?
지금은 어느 세월인가. 머릿속인가, 육체인가. 육체의 말초가 거미줄처럼 빼곡한 세상, 머릿속에 빗장을 걸어놓고 비열과 비겁의 선택만 고집한다. 육체의 쾌락을 위해 머릿속은 손쉬운 거짓의 평행우주만을 선택한다. 그래서 지금은 비열해 비루한 연대의 시대다.
집필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의 우주가 아니다. 하나의 우주에 매여 있어 평행우주로 열려 있는 다른 시공간에 범접할 수 없을 뿐이다. 이 소설은 양자컴퓨터의 발명 덕에 실현된 가상현실, 즉 현실과 흡사한 ‘세컨드 라이프’를 경험하는 가까운 미래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깊은 불황 속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는 빈민들과 제도권 밖으로 튕겨나간 주인공의 비루한 일상, 그 속에서 머릿속과 육체의 비열한 연대를 통해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 갈등을 조명한다. 아울러 고립된 운명 속에서 인간의 탐욕과 집착이 만들어내는 비루한 연대와 생존을 위해 시, 공간에 남기는 흔적들의 가벼움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말
Solitaire ou Solidaire? 고독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연대를 선택할 것인가?
이 소설은 바로 알베르 까뮈가 보았던 ‘요나’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명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얻는 순간부터 결제된 육체와 머릿속의 비루한 연대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아울러 생명을 잃기 전, 연대를 어떻게 해제하는 것이 옳은지 묻는 질문이다.
오랜 세월 인간은 이 명제의 덫에 걸려 고뇌의 생명을 살고 있다. 머릿속과 육체는 늘 동등한 자격으로 연대를 맺지 않는 탓이다. 머릿속이 우월한 포석을 차지하면 신을 노래하고 육체가 태양을 삼키면 신을 경멸한다. 그런 곡절의 세월이 바로 인간의 역사였다.
지금은 어느 세월인가. 머릿속인가, 육체인가. 짚어 펼치지 않아도 육체의 말초가 거미줄처럼 빼곡한 세상이다. 머릿속에 빗장을 걸어놓고 비열과 비겁의 선택만 고집한다. 육체의 쾌락을 위해 머릿속은 손쉬운 거짓의 평행우주만을 선택한다. 그래서 지금은 비열해 비루한 연대의 시대다.
슈뢰딩거가 옳았다. 세상은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혼돈의 바벨탑이다. 1도 0도 아닌, 중간계가 바로 이 세상의 실체다. 머릿속과 육체의 비루한 연대 역시 마찬가지다. ‘나’라는 머릿속은 육체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지만 ‘DNA’에 의해 지배되는 육체는 머릿속마저 ‘DNA’가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탓에 비루한 연대는 늘 불협화음으로 신음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고 생각하는 머릿속은 옳지 않다. 차라리 가장 나약한 동물이라 투덜대는 육체가 옳다. 그러나 육체의 생존을 위해 머릿속을 DNA로 채우는 것은 더더욱 옳지 않다. 적당한 타협에 의한 머릿속과 육체의 공존도 그다지 흔쾌하지 않다.
비루하다 못해 비참한 연대의 시대에 서서 다시 고독과 연대를 생각한다. 너는 고독을 선택할 수 있는가. 비열과 비겁에 굴복하지 않은 머릿속, 혹은 육체의 고독을 너는 선택할 수 있는가. 그것이 불가不可하다면 너는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삶의 궤적을 그려나가겠는가.
‘요나’가 묻는다. 너는 인간인가. 아니면 눈앞에 다가온 평행우주를 저울질하는 요사스런 몸짓에 불과한가. 그 답은 결코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고립이 아닌 고독을 선택할 수 있는 실존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