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말의 힘
본문 일부
나, 이런 사람이야! -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됩니다
에피소드)
입사 동기 노 과장은 똘똘해 보이는 외모에 논리정연한 말투로 공적 자리에서든 사적 자리에서든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말하곤 했습니다. 늘 반듯한 정장 차림에 상사에게든 후배에게든 먼저 인사를 건넸고,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는 화제를 이끌어가고자 노력했지요. 미리 변명하자면 노 과장이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가진 독특한 화법이 문제였죠.
“이런 프로젝트는 예전에 대기업 다닐 때 다 해본 거라 별 문제 없습니다.”
“저한테 배울 거 많다고 따라다니는 후배들 엄청나죠. 월급이 밥값, 술값으로 다 나간다니까요.”
“필독서 몇 권으로 엄살은. 저는 신입 때 밤새워가며 천 권은 독파했는걸요.”
“집안에 법조인 있으면 든든하죠. 제 와이프가 변호사니까 문제 생기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제가 멘사 출신이라 그런지 우리 애 아이큐가 엄청 높은 거 같아요. 의사를 시켜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헬스장 갔더니 자꾸 20대 아니냐 그래요. 저번엔 대학생인 줄 알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니까요.”
“어제 저녁 뉴스 봤어요? 우리 작은아버지가 국립대 교수인데 인터뷰 나오셨거든요.”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도 자기 자랑으로 마무리 짓는 기묘 한 재주. 입사 초기에는 서로 잘 모를 때라 자기PR을 잘하는 사람쯤으로 여기고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패턴이 매일 반복되니 그와의 대화에서 피로감이 밀려오더군요.
요즘은 노 과장의 자랑이 시작되면 부서원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살 길을 찾습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지는 사람, 부장님이 시킨 일을 깜빡한 사람, 딴청을 부리는 사람, 대충 말을 얼버무리는 사람 등등. 직속후배만이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치고 있고, 갓 들어온 인턴은 영문도 모른 채 ‘엄지 척’하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시콜콜 자랑하지 않아도 노 과장이 멋지고 좋은 사람이란 걸 다들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애쓰는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어서 애쓰는 사람 말이죠.
솔루션)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됩니다.
자금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느 나라에 가든 그 나라 정사를 듣게 되는데, 스스로 구하신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자진해서 알려드린 건가요?” 자공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온화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손했기 때문에 듣게 된 것이지요. 선생님이 구하는 방법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겠습니까?”《논어》, <학이 10>
“노나라 대부 맹지반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부대가 후퇴할 때 엄호하기 위해 뒤에 남아 싸우다가, 성문에 들어갈 무렵 자기 말을 채찍질하면서 ‘내가 일부러 뒤에 선 것이 아니라 말이 빨리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논어》, <옹야 14>
제자 자장이 물었습니다. “선비는 어떠해야 통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이 말씀했습니다. “자네가 말하는 통달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장이 대답했습니다. “나랏일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알려지고, 집안의 일에서도 거침이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그저 소문난 것이지 통달한 것이 아닙니다. 통달이란 본바탕이 곧고 의로움을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살피고 얼굴빛을 헤아리며, 사려 깊게 남들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랏일에서도 반드시 통달하고, 집안의 일에서도 반드시 통달하게 됩니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얼굴빛은 인자하나 행실은 그와 다르고,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도 나랏일에서 반드시 소문은 나고, 가문에서도 반드시 이름은 나게 됩니다.”《논어》, <안연 20>
“높고 크십니다! 순임금과 우임금은 천하를 가졌으나 몸소 그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논어》, <태백 18>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실속 없는 사람이 겉으로 더 떠드는 모습을 비유한 말이죠. TV 광고, 광고성 기사, DM, 전단지, 현란한 간판, 심지어 개인 SNS 계정만 열어도 쏟아지는 광고와 홍보 속에 사는 요즘, 그중에서 ‘빈 수레’를 구별해내는 일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중략)
개인이든 회사든 물건이든 처음 몇 번은 관심을 끄는 말이나 활동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이면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실속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죠. 공자가 제자 자장과 ‘통달’에 대해 나눈 대화를 보면 실속이 있든 없든 이름은 얼마든지 알려질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다만, 전자는 내실이 갖추어져 자연스럽게 알려진 것이므로 ‘통달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후자는 내실 없이 알려진 것이므로 거짓이나 위선에 불과하게 되지요. 이름이 알려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자장에게 내실부터 다져야 한다고 일러주신 겁니다.
공자는 출생 신분이 천하고 집안이 가난해 창고지기, 축사지기를 하며 자랐습니다. 이런 공자를 사람들은 왜 따랐던 걸까요? 덕을 갖춘 인품, 평소의 올곧은 언행이 입소문을 타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게 된 거죠. 곁에서 오랜 시간 지켜보아도 소문 그대로 한결 같았기에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머물렀던 거고요.
그렇게 모인 출중한 제자들이 공자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이어갔습니다. 여러 나라 책임자들도 공자를 만나면 나라 사정을 털어놓고 평소 궁금하거나 어려웠던 점을 질문하게 됐지요. 공자는 이름을 알리려고 사람들에게 구하러 다닌 게 아니라 내실을 갖춰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구함을 받았던 겁니다.
공자가 존경했던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이 그랬습니다. 권력과 부를 가지려 애썼던 게 아니라 평소 쌓은 인격과 실력으로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자손이 아닌데도 왕위를 물려받았지요.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자신의 공을 드러내거나 위신을 세우는 데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생활은 검소했고 자신의 본분인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니 주변에 늘 인재들이 모이고 백성들의 만족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죠.
내면이 단단하고 내실을 갖춘 사람들은 굳이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거나 명성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를 갈고닦으며 맡은 역할에 충실할 뿐이죠. 반대로 자신의 위치에 불안함을 느끼거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런 약점을 감추거나 회피하기 위해 오히려 더 크게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공자는 본래의 목적을 잃고 이름 얻기에만 급급해질 때 거짓이나 위선이 아닌지 스스로 살필 줄 알아야 한다고 당부했던 겁니다.
“내실을 갖추는 일에 힘쓰고 있나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신경 쓰지 마세요. 언젠가 스스로 빛날 테니까요.”
팁박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고대 중국의 제왕으로 태평성대를 이룬 성인으로 추대 받고 있습니다. 우 임금은 중국 하나라의 시조이기도 하죠. 요임금은 효행과 인덕이 뛰어난 순임금에게, 순임금은 홍수를 다스린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왕위를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덕을 갖춘 훌륭한 인물을 찾아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이라 하지요.
공자는 순임금과 우임금이 평소 쌓은 공덕으로 왕위를 선양받게 된 점, 왕위에 있으면서도 지위나 부귀영화를 즐긴 게 아니라 나라를 잘 다스릴 방법에만 몰두하여 태평성대를 이룬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자리가 아닌 그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에 목적을 두었기에 왕으로서 얻게 되는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나라를 더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왕위를 물려주는 일도 가능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