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올해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탄생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아인슈타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대성이론으로 뉴턴 이후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우주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천재 과학자. 그의 이론으로 이전까지 설명 불가능하던 수많은 우주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해의 근간 자체가 달라졌다. 하지만 그런 아인슈타인도 어린 시절에는 말을 배우는 것이 남보다 늦었을 뿐 아니라 학교 부적응에 따른 성적 부진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하지 못했고,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나 낯선 땅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아인슈타인 명언: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배관공이 되고 싶다』는 이렇듯 과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삶을 살아갔던 아인슈타인이 남긴 명언들을 담아냈다. ‘명언’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그럴 듯한 경구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유산으로서의 ‘지혜와 철학’을 옮겨놓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언어와 행위는 최고의 반열에 오른 천재 과학자의 위상과는 걸맞지 않을 만큼 소탈하고 엉뚱했다. 하지만 그런 그였기에 권위주의와 엄숙주의를 탈피하고, 과학에 헌신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우주에 몸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소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울리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뮌헨에 전기공장을 세우고 일을 시작하자 그곳으로 이주해 학업을 시작했으나 19세기 독일의 엄격하고 현학적인 교육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성적 부진으로 김나지움을 졸업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가족들이 밀라노로 이주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서 독학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해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하지만 그의 탁월한 수학 성적에 주목한 학장의 배려로 아라우에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후 마침내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900년 봄, 대학을 졸업한 그는 스위스 시민이 되었고, 2개월간 수학 가정교사로 일하다 베른에 있는 특허사무소 심사관으로 채용되었다. 5년간 특허사무소에 일하던 아인슈타인은 1905년 독일의 『물리학연보Annalen der Physik』에 5개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이라는 논문으로 연방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다른 논문들에서는 유명한 광전효과, 브라운운동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제시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모든 좌표계에서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모든 자연 법칙이 똑같다면,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이론을 제기하면서 그때까지 인간이 가지고 있던 우주관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또한 그는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원리를 확립했는데, 이에 따르면 ‘물질이 갖는 에너지는 그 물질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과 같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공식 E=mc2이다.
특수상대성이론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14년 독일 프로이센과학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그곳에서 연구하면서 때때로 베를린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1916년 마침내 『물리학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를 발표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뉴턴이 말한 힘이 아니라 ‘시공연속체 속에 있는 존재에 의해 생긴 굽어진 장(場)’이다. 그의 이론으로 시공간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으며, 그때까지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우주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19년 런던 왕립학회가 프린시페 섬에서 행한 과학탐사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예측한 계산값을 증명하는 일식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1905년에 발표한 ‘광전효과’에 대한 공로 때문이었다. 이 이론을 설명하는 광양자 가설은 훗날 양자역학을 낳는 시금석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양자역학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고 거리를 두며 말년에는 주로 통일장이론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난 그는 이후 20여 년 동안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거의 변화 없는 생활을 유지했다. 1939년,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핵무기 연구에 관한 유명한 서한에 서명함으로써 ‘맨해튼 계획’ 수립에 영향을 끼쳤지만,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충격을 받아 핵무기 폐기를 위한 운동에 동참했으며, 비무장 세계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편 1940년,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을 유럽인으로 생각했다. 1952년 이스라엘의 2대 대통령을 제안받기도 했던 그는 이를 정중히 거절하고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1955년 대동맥류 파열로 프린스턴 병원에 입원한 뒤 그해 4월 18일 그곳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