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외출하고 싶다
「비밀은 외출하고 싶다」는, 다시 액자소설의 형식을 동원했다. 화자인 ‘나’는 집안 어른인 ‘민순 아짐’의 방문을 받고 그 가족의 비밀을 전해 듣는데, 그것은 종교적 신앙으로 수혈을 거부하며 생명을 경각으로 내모는 이야기이다. 그의 동생 민철의 아내가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수술과 수혈이 이루어져야 하는 형편인데,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동생을 속이고 수혈을 감행하여 목숨을 살렸다는 전말이다. ‘아짐’은 비밀 누설, 곧 자기 카타르시스의 탈출구로 ‘나’를 선택했고 더불어 ‘나’는 자신의 종교적 판단에 이를 반사해 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아짐’의 행위를 지혜롭다고 평가한다. 종교적 상식이나 건전성, 곧 이단 시비에 관한 한 줄의 언급도 없이 깔끔한 마무리에 이른 것은, 이 작가의 숙성한 세상보기를 반영한다.
「하늘로 날아간 새」 역시 액자소설의 기법을 사용했고, 천주교의 낙태 금지 교리를 원용하지 않고서도 태중에서부터 아이 모두를 사랑하는 한 어머니의 순수한 아픔을 손에 잡힐 듯 명료하게 그렸다. 화자인 ‘혜정’은 관찰자의 눈으로 그 어머니 ‘선영’의 심리적 동향과 숨어 있던 사실의 발굴을 점진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 아이를 하늘로 떠나보낸 후 아이의 주검을 둔 곳에 한 달에 한 번 찾아가는 선영과, 교회의 차량 봉사로 그 왕래에 발이 되어준 혜정은, 생명의 귀함과 서로를 위무하는 신앙의 귀함을 함께 체득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통과 공감은 외형적이거나 물질적인 차원에서는 습득이 불가능한 것이니, 그 중심에 종교적 실천이 매설된 셈이다.
「2010년 6월」은 종교성을 포괄하면서 이와 함께 노년에 이른 삶의 균형 있는 시각을 동시에 보여주는 소설이다. 미국에서 메일을 통해 한국의 정치 현실에 관한 비분강개를 보내오는 ‘회장님’이 있는가 하면, 상당한 진보적 의식을 갖고 선거날 어머니에게 야당에 표를 주라고 요청하는 미국의 아들도 있다. ‘나’는 다시 주변에 이와 같은 의견들에 대한 조회를 요청하고 각양각색의 답변과 주장을 들으며, 종교적 판단도 받아본다. 종내의 ‘나’는 이러한 일련의 혼란스러운 일들에서 해방될 것을 선언하고 ‘기도’로 돌아간다. 세상의 이목에 기대기보다 종교적 진실을 추구하는 쪽으로 길을 바꾸었다면, ‘나’야말로 명약관화한 ‘종교적 인간’이다. 작가는 스스로 세속에 연접하여 쟁론하는 종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 권위에 순응하여 탈각을 도모하는 종교로 넘어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로체스터 통신」에서는 신앙을 통한 구원관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한 어머니 노인이 미국에 살고 있는 큰아들 집을 방문하여 뒷바라지를 하는 동안 한국 교회의 신부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비밀을 털어놓는다. 모든 면에 우수한 큰아들과 형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작은아들, 두 아들을 중심으로 가족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어머니는 연민에 찬 눈으로 작은아들을 보살피지만 아버지나 형은 그를 외면하고 더욱 이기적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 속에서 작은아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어머니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이때 이웃의 권유로 ‘하느님’을 만난 노인은 증오의 대상이었던 남편과 큰아들을 용서하게 된다. 그 후 미국에서 큰아들을 돌보게 되는데, 거기서 노년의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이를 신앙으로 극복한다. 그런데 수신인인 그 신부는,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보니 화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기지가 살아 있는 지적 조작은, 문득 이 글이 소설로 값이 있다는 후감을 촉발한다.
신앙 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단편 「酒님? 主님!」은,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로서의 술과 절대자 사이에서 신앙인들이 당착하는 현실적인 일을 가볍고 속도감 있게 다룬 소설이다. 개신교와 달리 금주(禁酒)가 절대적이지 않은 천주교의 교인이, 이에 대한 절제를 상실했을 때 발생하는 사태를 하나의 본보기 예화처럼 그려 보인다. 그런가 하면 지금의 부부 사이를 거슬러 과거사의 술과 관련된 이력들도 이끌려 나온다. 중심인물 ‘소피아 씨’의 선택은, 그러나 결국 ‘기도’이다. 이제껏 살펴본 이 작가의 신앙은 이렇게 삶과 사유의 모든 부면에 두루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