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탄생과 몰락
무엇이 제국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가?
세 번의 탄생과 몰락을 되풀이한 중국 격변기 역사에서
국가와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는다!
이 책은 동양 최초 제국 진(秦)의 탄생에서 《초한지》의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겨루다 유방이 통일한 한(漢)을 거쳐, 도덕 지상주의자 왕망의 신(新)까지 ‘진한제국’ 부흥과 몰락의 역사를 담고 있다.
진한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뿌리는 바로 한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진한제국은 현대 중국의 중앙집권체제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화폐 및 토지개혁을 통해 경제적 부흥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법제의 기초가 바로 이 시대에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서 화려한 부흥기를 일구었던 진한제국은 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이 책은 《사기》《한서》로는 풀리지 않는 진한제국 몰락의 원인을 새롭게 발굴된 고고문헌과 북경대, 중국인민대 역사교수들의 충실한 자문을 거쳐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또한 어떤 영웅들의 어떤 변화를 위한 움직임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는지 굵직굵직한 인물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짚어봄으로써 무엇이 국가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치는지 성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제국의 흥망을 결정하는가?
세 번의 탄생과 몰락을 되풀이한 중국 격변기 역사에서
국가와 리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는다!
이 책은 동양 최초 제국 진(秦)의 탄생에서 《초한지》의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겨루다 유방이 통일한 한(漢)을 거쳐, 도덕 지상주의자 왕망의 신(新)까지 ‘진한제국’ 부흥과 몰락의 역사를 담고 있다.
BC 221년 진 시황이 격동의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전한과 후한 사이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왕망이 농민반란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기까지는 244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제국이 세 번 탄생하고, 세 번 몰락한 것이다.
그러나 진한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뿌리는 바로 한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진한제국은 현대 중국의 중앙집권체제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화폐 및 토지개혁을 통해 경제적 부흥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법제의 기초가 바로 이 시대에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면에서 화려한 부흥기를 일구었던 진한제국은 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CCTV는 왜 다큐 방영을 중단했을까?
중국의 오늘과 오버랩되는 진한제국의 몰락 과정
이 책의 원작이 된 다큐 ≪제국의 흥망성쇠帝國的興衰≫는 중국 다큐전문채널 CCTV9에서 2011년 2월 방영되었다.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은 다큐 ≪돈황敦煌≫과 ≪고궁古宮≫의 제작팀이 “현대 경제학 개념과 새롭게 발굴된 고고문헌을 통해 진한제국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취지로 6년에 걸쳐 제작해 방영 전부터 많은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총 5부작으로 제작된 다큐는 3부까지 방영하고 아무런 설명 없이 방영이 중단되었다. 이를 놓고 중국 SNS 웨이보 등에서 많은 의문이 제기됐지만, 이와 관련된 글들이 모두 인터넷에서 삭제되고 검색조차 되지 않도록 조치되었다. CCTV 관계자는 방영 중단에 대해 상부의 지시라는 틀에 박힌 대답만 내놓았을 뿐이다.
현재 중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불균형’으로 인한 도농간 갈등이다. 다큐 3부에서 굶주린 농민반란으로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고, 미방영분 역시 후한이 몰락한 원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보니 다큐 내용이 농민공의 불만을 두려워하는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고 편저자 김원동 씨는 추론한다.
진한사로 보는 국가경영과 리더십의 본질
중국의 오늘을 이해하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
진한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관료와 지주들이 토지를 모두 차지하면서 땅을 잃은 백성들이 유민이 되어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왕망은 백성들의 폭동을 잠재우기 위해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통해서 토지를 국유화함으로써 모든 백성들이 똑같이 부를 나눠가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좋은 해결책은 아니었다. 개혁은 실패하고 왕망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국가 소유의 토지를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팔아 넘겨 부자가 된 지방정부의 관료들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농민공들은 죽어라 일해도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절망 속에서 온갖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다. 중국 당국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농민공들을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오는 3월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시진핑이 이끄는 새로운 지도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사기》《한서》로는 풀리지 않는 진한제국 몰락의 원인을 새롭게 발굴된 고고문헌과 북경대, 중국인민대 역사학자들의 충실한 자문을 거쳐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또한 어떤 영웅들의 어떤 변화를 위한 움직임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는지 굵직굵직한 인물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짚어봄으로써 지도자의 리더십이 국가의 흥망성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이해의 실마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
제국의 탄생
진 시황은 400여 년 춘추전국 난세를 마감하고 기원전 221년 마침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고 황제가 된다. 진 시황은 수많은 정치적 혁명과 제도의 변혁을 통해 후대 중국에 가장 많은 유물을 남긴 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난세를 지배한 낡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도입하여 절대왕권을 확립함으로써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다. 그러나 15년 만에 그 자리를 한 고조 유방에게 내주고 만다. 한 고조 유방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인 초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진제국에 이어 두 번째 제국인 한나라의 황제가 된다. 평민 출신인 유방은 집권 초기 10여 년간 왕권을 위협할 만한 사람은 제거하고 자신과 같은 성(姓)을 지닌 자만 제후국의 왕으로 앉히는 등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정치제도의 개혁
진 시황의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2,000여 년의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채택되었다. 유방은 봉건제와 군현제의 장점을 합친 ‘군국제’를 시행하다 천하통일을 완성한 후 다시금 완벽한 중앙집권체제로의 회귀에 성공한다.
후대 역사가들은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제도가 중국의 농경 위주인 전통사회에 입각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이전의 어떤 정치제도보다 제국의 부흥을 이끄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중앙집권제는 중앙과 지방 간 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데 진 시황도 유방도 이에 있어서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진제국 때에는 지방세력을 너무 강하게만 압박하여 모든 권력을 중앙으로만 집중한 것이 결국 진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고, 반대로 전한제국 때에는 지방세력이 너무 득세하여 오초칠국의 난처럼 중앙정부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개혁의 원동력이 된 토지제도
진 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 진나라는 걸출한 개혁가 상앙에 의해 토지제도를 개혁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작위 등급에 따라 토지를 차별적으로 나눠주는 군공작위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농업 생산량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군사력 또한 강화되었다.
상앙의 20등급 작위제도는 진제국을 거쳐 한제국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 고조 유방의 사후에 태후 여치는 국가가 농민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수여하는 국가수전제를 도입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전제가 농민들에게 똑같은 면적의 토지를 나눠주고 경작하게 했던 반면, 국가수전제는 작위 등급에 따라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이에 대한 매매나 양도도 가능하게 하는 제도였다. 토지개혁은 백성들의 부에 대한 열망을 촉진시켜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짓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상업제도와 재정정책
정부의 전폭적인 민간경제 촉진 정책에 힘입어 한제국의 상업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런데 민간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중앙정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다고 판단되자 정부는 거꾸로 소금, 철기 등 주요 기간산업을 다시 국유화하여 민간자본의 성장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난 국유자본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없는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으며, 각종 제약으로 인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민간자본이 대거 토지로 몰려들어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탄생했다. 이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철기 제작이 국유화되면서 농기구 품질이 나빠지고 농업생산량이 대폭 줄어들어 생산성이 크게 저하되었다. 결정적으로 토지가 지주들의 손에 넘어가면서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농민들이 크게 늘어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제국의 몰락
전한제국 말기에 관료와 지주들이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집과 토지를 삣긴 백성들은 유민이 되어 끊임없이 폭동을 일으키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폭정에 지친 백성들은 청렴하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군자의 모습을 보여온 왕망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고, 이에 왕망은 ‘신(新)’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왕망은 개혁정책 입안 및 시행 과정에 있어 당시 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많은 현실적인 문제를 도외시한 채 실행력을 갖기 힘든 이상주의적 정책만을 추구했다. 과도한 도덕 이상주의를 신뢰한 왕망은 나머지 계층 간의 갈등 또한 도덕과 교화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 정책들은 전혀 실행력을 갖기 힘든 텅빈 구호에 불과했기에 대토지 소유자들과 지방호족들은 그 기회를 틈타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결국 왕망의 야심찬 정치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