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사람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
‘생각’과 ‘종교’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시대와 색채가 다른 세 명의 철학자의 단편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1편 키르케고르의 〈집단은 거짓이다〉는 키르케고르 사상의 핵심과 그가 이해하는 신앙의 본질을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텍스트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에 당연히 집단의 일원이 되고, 무엇인가를 ‘집단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념뿐 아니라 종교에 대해서도 집단적으로 생각한다. 집단으로서의 삶이 인간의 실존인가? 키르케고르는 이 글을 통해 개인, 단독자로서의 존재가 진정한 실존임을 밝힌다. 그러면서 집단으로 퇴락해 버리는 신앙을 단독자의 개념으로 회복해 낸다.
2편 임마누엘 칸트의 단편 저작인 2편의 본래의 제목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지만, 관용적으로 간단하게 줄여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로 약칭해서 사용한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1784년 9월 30일에 씌어졌고 〈월간 베를린〉의 1784년 12월호에 게재되었다. 계몽주의가 무엇이며, 계몽주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 시대를 살았으며 계몽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직접 쓴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읽히고 연구되는 글이다. 이 글이 쓰이기 1년 전, 프로이센 정부에서 공직을 맡기도 한 목사 요한 프리드리히 쬘너가 〈월간 베를린〉에 〈결혼식에서 더이상 성직자를 참여시키지 말자는 제안〉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식을 생략한 세속 결혼식의 폐습을 비판했다. 이 기고문에 “계몽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함에도 나는 이 질문이 답변된 것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이 기고문을 계기로 프로이센에서 계몽논쟁이 벌어졌고, 그 성과가 바로 칸트의 이 글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사페레 아우데, 과감하게 생각하라”는 계몽의 모토를 밝힌다.
2500년 전의 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매혹적인 우주론이 펼쳐지는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서사시가 이 책의 3편을 구성한다. 학자들은 본래 이 서사시가 800개의 행으로 이뤄졌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현재 150개 정도의 시구만 단편으로 남아있다. 파르메니데스 서사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서시, 진리편, 의견편이다. 서시에 해당하는 단편 1은 거의 온전히 전승됐다. 시인이 여신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며 여신은 시인에게 진리의 길과 의견의 길로 구별되는 두 개의 길을 설파한다. 단편 2에서 단편 8 의 ‘내 신실한 말과 생각을 멈추노라’까지가 진리편이다. 여신은 시인에게 있음과 없음의 초월적이며 충만한 존재의 비경을 펼쳐놓으면서, “생각되는 것은 있으며/ 있는 것이 생각되나니/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니”라고 선언한다. 그다음은 ‘진리와 비슷한 거짓’에 관한 필멸자의 의견이 조각조각 펼쳐진다. 2500년 전 형이상학의 창안자는 우주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바라본 탁월한 관찰력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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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어도 구하기 어려운 텍스트들이 있다. 분량이 방대해서 미처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로 인류의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저작임에도 분량이 너무 적어서 한 권의 책으로 편찬되지 못하기도 한다. 이 책은 ‘종교’와 ‘생각’이라는 두 단어를 열쇳말로 세 편의 철학 단편을 하나로 엮었다. 키르케고르의 〈집단은 거짓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에 관한 서사시〉가 자연스러운 우리말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각 단편은 분량이 매우 적다. 그러나 그 의미는 유별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집단은 거짓이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개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키르케고르의 사상과 문장과 신앙심이 담겨있다. 사상은 독특하고, 문장은 탁월하며, 신앙심은 독실하다. 이 책의 빛나는 장점은 ‘단독자’ 개념을 독자에게 선물한다는 점이다. 키르케고르 자신도 ‘세속적인 목적’에 관해서는 집단이 타당성이 있고 결정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에 관해서는 집단은 거짓이며 거짓일 수밖에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집단은 회개하지 않는다. 집단은 비겁하다. 집단은 생명을 차별한다. 집단은 허위다. 키르케고르는 이 단편을 통해 진리의 전달자는 집단이 아니라 오직 단독자임을 밝힌다. 단독자가 진리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단독자가 될 수 있다. 또한 단독자여야만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거짓만큼 발이 빠르지 않으며 거짓은 진리보다 맛있게 준비되어 있으니, 단독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지식, 교육, 규율, 절제, 자기 부정, 자신을 향한 정직한 염려가 필요하다. 결국 집단에 자기를 맡기지 말고 진리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
과감하게 생각하라. 다시 말하면 용기를 내서 스스로 알려고 하라, 이것이 계몽의 모토이다. 우리 인간은 과감하게 생각해야만 미성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쓰인 표현이다. 이만큼 계몽주의의 핵심을 설명하는 저작이 있을까? 스스로 과감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집단에 종속되고 거짓에 현혹되며 나쁜 선동에 휩쓸리고 만다. 18세기, 19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를 향한 여전한 충고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의 이 단편이 지금도 읽힌다. 칸트에게 생각은 곧 표현의 자유와 연결되기 때문에, “계몽에 필요한 것은 자유 말고는 없습니다”라는 명제가 제시된다. 하지만 무제한적인 자유는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지식인으로서 자기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자유는 무제한 허용되어야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면 자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논증한다. 인간의 미성숙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며,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계몽이다. 과감하게 생각하라.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는 어느 고매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생각되는 것은 있으며 있는 것이 생각되나니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니”라는 시구를 읊었다. 있음은 있고, 없음은 없다는 동어반복을 통해 창조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소멸도 없는 진리의 비경을 제시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탄생을 열어젖혔고 매혹적이고 황홀한 우주론을 펼친 고대의 거인 파르메니데스다.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에 관한 서사시〉가 이 책의 3편에 위치해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진리의 길과 진리를 닮은 거짓의 길(의견의 길)을 여신의 목소리로 전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에 관심을 가져도 파르메니데스를 만나면 절망한다. 본디 난해할 뿐더러 흔히 사용하는 우리말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저명한 서사시가 시의 형식으로 우리말로 알맞게 번역되었다. 평범한 독자들에게 선물과 같은 번역이다. 여신이 말씀하신다. 있음에도 | 부재한 것을 지켜보아라 | 머릿속에 흔들림 없이 존재하노라 | 있음으로 한몸이 된 것에서 | 있음을 잘라낼 수 없을 테니 | 우주 모든 곳으로 흩어지겠느냐 | 흩어진 것이 다시 모이겠느냐. -에디터 추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