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케이리디온,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을 때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전성기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였다. 그는 한때 비천한 삶을 살았다. 지금의 터키 영토인 프리기아 지방에서 출생했지만 곧 네로 황제의 행정 비서관인 에파프로디투스의 노예로 보내졌다. 게다가 그는 절름발이 불구의 몸이었다. 하지만 영특했다. 주인은 어린 노예를 당대 스토아 철학자 가이우스 무소니우스 루푸스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에픽테토스가 어쩌다 노예가 됐으며 언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주인 에파프로디투스가 후일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처형을 당한 후 어떻게든 자유를 얻어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엥케이리디온’은 고대 그리스어로 ‘손 안에 든 것’을 의미한다. 에픽테토스는 소크라테스나 공자처럼 직접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긴 것처럼, 그의 제자이자 역사가인 아리아노스가 스승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정성껏 기록했다고 한다. 그 기록의 일부가 〈담화록The Discourses〉으로 오늘날까지 전승됐다. 아리아노스는 자신이 엮은 담화록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요약해서 손 안에 들고 다니며 읽을 수 있도록 핸드북으로 편찬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 〈엥케이리디온〉이다. 영어로는 핸드북Handbook 또는 매뉴얼Manual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실로 〈엥케이리디온〉은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 철학의 정수가 담긴 책이다. 그리고 이 번역은 엘리자베스 카터의 1750년 영어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고 여러 세대를 거쳐 출간된 다양한 번역본을 비교하면서도 학자들의 연구를 반영한 성과로, 특히 21세기 현대 한국인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번역됐다는 큰 장점이 있다. 전성기 로마 시대의 정신이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 살아있는 언어로 전승됐다는 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흥미롭게도 그 정신은 이상국가를 논하고 진리의 본성을 설파하는 사회적 관심이 아니라,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토록 해주는 평온함이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이 사라지고 거대담론도 흩어진 오늘날,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며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준다. 2천 년 후의 한국인에게 로마의 스승이 보내는 위로의 편지다.
세상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저마다 삭막한 경쟁 구조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에 빠진다. 이런 우리들에게 로마의 위대한 선생이 말씀하신다. 세상에는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괴로워하지 말라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53개의 장의 짧은 에세이가 이 책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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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호수로 삼았던 고대 로마제국 시대,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고민했으며 어떤 책을 읽었을까? 그리고 그때의 책이 과연 이 시대의 독자들을 자극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이 책이 기획됐다.
전성기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었다. 변방에서는 여전히 여러 정복 전쟁이 이어졌고 최고 권력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지긴 했어도 이 영화로운 제국을 당장 위협하는 세력은 없었다. 냉전이 끝난 세계 질서 속에서 지긋한 독재를 무너뜨린 후 민주주의 사회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정치적 안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제국의 당시 사회상을 소개하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쾌락과 향락 문화가 결국 로마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다. 성공한 자본주의가 펼쳐내는 오늘날의 풍요로움은 로마시대에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로마는 서쪽만 놓고 봐도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제국을 유지했다. 향락 문화만으로 로마제국을 평가한다면 진즉에 망했을 터이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은 제국을 보전한 다른 정신적인 무기가 있었음을 능히 짐작케 한다.
향락이 아닌 금욕을 강조하며, 쾌락이 아닌 평정심을 설파했던 스토아철학이 그런 무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책이 기획됐다. ‘황제의 명상록’과 ‘재상의 편지’로도 스토아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의 훈계보다는 노예이자 불구였던 에픽테토스의 조언이 시대를 뛰어넘는 진심이 묻어나리라 생각했다. 성공한 자본가들이 보기에 우리들 대부분은 노예이자 불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끝에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지금껏 여러 번역본이 출간됐다. 저마다 특색이 있을 것이며, 번역마다 역사를 남긴다. 그러나 이소노미아만의 번역본을 더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한국인에게, 로마의 지혜가 전해지기를 희망했다. 〈엥케이리디온〉은 에픽테토스 가르침의 요약본이다. 그것도 손에 쥐고 다니면서 어디에서든 읽을 수 있도록 편찬된 핸드북이었다. 그런 사물의 본성에 맞는 번역본을 펴내고 싶었다. 학자를 위한 번역을 넘어, 연구를 위한 사료가 아닌,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을 때’, 사람들의 정신을 진정으로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 번역이라면 알맞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희망과 노력의 성과다. -에디터 추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