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러브크래프트 서클”은 H. P. 러브크래프트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군의 작가와 그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려는 시도입니다.
윌리엄 호프 호지슨은 러브크래프트의 미리보기일 때가 많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유령선」도 20년 미리 보는 『광기의 산맥』이고 「우주에서 온 색채」가 아닐까 싶은데요.
호지슨이 선원 생활을 하면서 체감한 바다는 생명의 원시성과 대자연의 힘을 가장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 생명과 자연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작가 호지슨은 글 쓰는 여정에서 그 근원과도 같은 바다로 자주 회귀합니다. 차원의 경계를 넘나들고 오컬트의 영적 세계를 오가다가 홀연히 바다로 돌아오곤 하는 데요.
호지슨이 돌아온 오늘의 바다는 육식 균류(곰팡이)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어느 새 문학과 영화 등에서 클리셰가 된 촉수와 균류는 100년 전의 러브크래프트에겐 호지슨을 향한 오마주였겠지요. 이 곰팡이 괴생명체는 무기물에서 발생한 생명의 한 예입니다. 이 자연발생설은 화자인 늙은 의사의 믿음이자 이 단편의 토대인데요. 선의가 탄 선박의 이름이 "베오스프세Bheospse"인데, 자연발생설의 토대인 "비오포이에시스biopoiesis"를 떠올리면 작품의 포석이자 선언처럼 보입니다.(이것은 역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호지슨 당대에도 이미 오류가 증명된 자연발생설이라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매력적인 창작의 모티프였나 봅니다.
의사 시험을 막 통과한 풋내기 의사인 화자는 중국행 쾌속 여객선에 선의로 승선합니다. 마다가스카르를 경유한 후에 강력한 폭풍을 만나 선박에 큰 손상을 입는데요. 선박을 수리하고 정비하는 과정에서 버려진 지 2백년은 됨직한 폐선 즉 유령선과 조우합니다. 호기심에 이 유령선을 탐사하던 선원들이 발견한 것은 선박을 뒤덮은 놀라운 곰팡이입니다. 이 발견의 보상은 충격과 공포입니다. “배가 살아있어!” 선장의 말로 대변되는 이 유령선은 화학식을 통해 무에서 탄생한 생명의 장이자 인간이 잡아먹히는 식인 지옥의 한복판인데요. 이 살기와 위협의 바다에서 호지슨은 가장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저자소개
지은이 윌리엄 호프 호지슨(William Hope Hodgson)
호러, 판타지, SF 장르를 넘나드는 장단편 소설과 에세이를 포함하여 다작을 남긴 영국 작가. 선원이 되고 싶어서 1891년 14세부터 부친의 허락 아래 4년간의 견습 선원 생활을 시작한다. 호지슨은 견습 과정에서 동료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했고, 이를 계기로 체력단련을 시작한다. 고참 선원들의 괴롭힘과 이에 대한 복수는 바다를 무대로 하는 그의 작품에 번번이 등장한다. 1899년(22세 때), 영국 블랙번에서 “호지슨 체력 단련장”을 여는데, 블랙번 경찰들도 등록하는 등 괜찮은 성공을 거둔다. 1907년에 첫 장편 『글렌 캐리그 호의 구명보트』를 출간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는다. 이듬해에는 『이계의 집』, 1909년에는 『유령 해적선』을 출간함으로써 러브크래프트가 호지슨의 삼부작이라고 칭한 장편 세편이 완성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1918년 4월 이프레스 전투에서 40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호지슨의 작품 상당수는 사후에 출간되었다. 이밖에 “유령사냥꾼 카나키”가 등장하는 『유령 사냥꾼 카나키 Carnacki, the Ghost-Finder』, 단편집 『폭풍으로부터 Out of the Storm』, 마지막 장편 소설 『나이트 랜드The Night Land』등이 있다.
옮긴이 미스터고딕 정진영
함께 기획하고 번역하는 팀이다. 미스터 고딕은 생업을 하며 틈틈이 준비해 온 원고들로 전자책을 만들고 있다. 고딕 호러와 러브크래프트를 좋아하지만, 때때로 현실과 일상이 더 공포스럽다고 생각하곤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작가와 작품을 만날 때 특히 기쁘다. 그런 기쁨을 출간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정진영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상상에서는 고딕 소설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잿빛의 종말론적 색채를 좋아하나 현실에서는 하루하루 장밋빛 꿈을 꾸면서 살고 있다. 고전 문학 특히 장르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기획과 번역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들도 소개하려고 노력 중이다. 스티븐 킹의 『그것』, 『러브크래프트 전집』, 『검은 수녀들』, 『잭 더 리퍼 연대기』, 『코난 도일 호러 걸작선』, 『죽이는 로맨스』, 『광기를 비추는 등대 라이트하우스』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