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의 한국사
일제강점기에는 흰옷 입으면 먹물을 뿌려?
우리 민족을 흔히 백의민족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예부터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었던 데서 비롯한 말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는 풍속은 염색을 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나온 주장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흰옷이 항일의 상징으로 자리 잡자 일본 정부는 색깔 있는 옷을 입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색의착용실행회’ 등의 단체를 만들어 이를 홍보하였다. 일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백성들이 협조하지 않자, 강원도 춘천에서는 흰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색의선전원’이 먹물을 뿌리며 폭행하기도 하였다.
또 농촌진흥운동이라면서 색깔 있는 옷을 입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고, 1929년에는 1월 5일을 ‘색깔 있는 옷을 입는 날’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흰옷을 입은 사람에게 먹물을 뿌리게 하고,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으면 시장에 나오지 못하게 하거나 벌금을 물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흰옷을 입는 것은 후진 민족이라고 한다든가, 색깔 있는 옷을 입는 것보다 비용의 지출이 많다고 선전하였다.
정조대왕도 안경을 쓸 때는 남의 시선을 의식했다
우리 조상들은 안경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이었다. 서양에서는 위엄의 상징으로 여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웃어른 앞에서 안경을 끼면 불경스럽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조는 눈이 나빠 안경을 썼는데, 조정에 나갈 때 안경을 낀 자신의 모습을 보고 관리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였다. 헌종의 외숙이 눈병이 있어 안경을 끼고 대궐에 드나든다는 말을 듣고 헌종이 “외숙의 목이라고 칼이 들지 않을꼬.” 하고 말했더니, 외숙은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고민하다가 자결하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고종은 근시로 시달리는 순종이 안경을 쓰면 야단을 쳤다고 한다.
조선 조정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안경에 대한 예법을 강조한 것이 아니었다. 1891년(고종 28) 일본 전권공사 오이시가 안경을 쓰고 고종을 만나자 일본 정부에 공식 항의하기도 하였다. 조선을 식민지배하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도 고종을 만날 때는 안경을 벗고 만나야 했고, 그가 벗어놓은 안경이 반일 감정에 의하여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던 모양이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청나라의 추천으로 우리나라에 파견된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가 안경을 벗고 삼배를 올리자, 고종은 안경을 쓰도록 허락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경을 ‘게눈깔’이라고도 하였으니,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과 함께 온 서양 사람들이 안경을 끼고 있는 모습이 툭 튀어나와 ‘게눈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경을 달리 부르는 말로 ‘애체’가 있다. 이 명칭은 중국에 안경을 전해준 네덜란드 사람의 이름이 ‘애체’였기에 붙인 이름으로, 조선에서 그 중국어 표기를 그대로 따와 부르게 되었다.
‘아양 떨다’는 여성들의 방한모인 아얌에서 유래한 말
조선시대 부녀자들은 겨울에 나들이할 때 아얌을 썼다. 여자가 콧소리를 내며 머리나 몸을 살살 흔들면서 애교 부리는 것을 ‘아양을 떤다’고 한다. 이 ‘아양’이란 말은 여자들이 쓰는 모자인 ‘아얌’에서 유래하였다. 겨울철에 부녀자가 나들이할 때 머리에 쓰던 방한모자가 아얌이다. 겉은 고운 털로 되어 있고 안쪽에는 비단을 댔다. 머리의 열을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정수리 부분은 터져 있어 이마만 두르게 되어 있다. 아얌의 앞쪽과 뒤쪽에는 붉은색 수술을 달아 장식하였다. 더 화려한 것은 뒤쪽에 널찍하고 길게 비단으로 만든 ‘아얌드림’을 댕기머리처럼 늘어뜨렸다. 그러니까 아얌을 쓴 여인이 콧소리를 내며 머리나 몸을 살살 흔들면서 애교를 부리면 수술 장식과 아얌드림이 가볍게 흔들린 데서 ‘아양’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깨끗이 하는 ‘양지楊枝’가 양치질의 어원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이를 닦는 방법이 전해졌다. 스님이 해야 할 일 중 첫째가 이를 깨끗이 하는 것인데 이를 ‘양지(楊枝)’라고 한다. 버드나무로 만든 이쑤시개를 사용하였기에 쓰인 말이다. ‘양치질’은 바로 양지에서 온 말이다.
1103년(숙종 8)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중국 송나라의 손목(孫穆)이 당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비롯하여 고려에서 사용하던 언어 360여 가지를 기록한 《계림유사》에도 ‘양지’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고려 사람들도 이쑤시개로 양치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에 이르러 치분이라 하여 가루를 낸 소금이 치약으로 쓰였다. 오늘날과 같은 치약은 6·25전쟁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온 미군이 쓰던 치약이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195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개념의 치약인 ‘럭키치약’이 생산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칫솔은 1938년 듀폰이 나일론을 소재로 만든 것이다. 습기가 스며들지 않는 나일론은 세균이 번식하지 않는 이점이 있고 질기고 탄력이 뛰어나 ‘기적의 칫솔’로 불리며 인기를 누렸다.
옛날에는 우산이 권위의 상징
오늘날 우산이나 양산은 비나 햇볕을 가리는 도구일 뿐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우산이 물리적인 기능 외에도 하늘의 뜻을 대신하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우산을 궁궐에서 함부로 사용하다가 파직을 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광해군일기》의 한 대목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대전께서 진하례를 마치시고 왕세자가 막 배위拜位를 떠나서 백관이 아직 반열에 있었을 때에, 승지와 사관 등이 우산을 높이 펼쳐 들고 전殿에서 뜰로 내려와 공공연하게 지나갔습니다.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들 서로 쳐다보며 놀라워하였습니다. 그 일의 체모를 알지 못한 바가 매우 심하니 파직을 명하소서.
그렇다면 서민들은 비나 햇볕을 가릴 때 어떤 도구를 사용했을지 궁금해진다. 가장 대중적인 것이 머리에 쓰는 삿갓이었다. 삿갓은 갈대나 대오리로 성기게 엮어 비나 볕을 가리기 위하여 썼는데,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도 사용했다.
삿갓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조선 순조 때의 시인인 김병연이다. 흔히 김삿갓이라고 부르는 그 인물이다. 그가 삿갓을 쓰고 전국을 떠돌며 남긴 시는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모아 엮은 《김립시집》에 실린 김병연의 시를 소개한다.
추미애가정신병秋美哀歌靜晨竝
아무래도미친연雅霧來到迷親然
개발소발개쌍연凱發小發皆雙然
애비애미죽일연愛悲哀美竹一然
가을날 곱고 애잔한 노래가 황혼에 고요히 퍼지니
우아한 안개가 홀연히 드리운다
기세 좋은 것이나 소박한 것이나 모두가 자연이라
사랑은 슬프며 애잔함은 아름다우니 하나로 연연하다
한문을 읽으면 조금 이상할지 모르나 해석을 하면 여간 마음에 와 닿는 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