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으로 본 한국인과 한국문화
우리 문화와 우리의 자화상을 있는 그대로 보자!
정신분석은 서구사회에서 지난 100여 년 동안 인간심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나 임상적으로 정신분석은 현대정신의학에 지대한 공헌을 끼치기도 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해 정신분석적 접근을 시도한 이유는 오랜 기간 보편적인 인간심리 이론으로서 자리 잡은 정신분석이론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보기 위해서이다. 그런 노력은 개인이나 집단 모두에게 매우 유용한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정신분석의 범위를 인간 심리에서 한 나라의 인물들과 문화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의 역사 및 사회적 현상과 관련된 내용들을 분석적으로 탐색해 개인적?집단적 현상을 심리적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한국문화의 본질에 문외한이기 쉽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에 너무 익숙하게 젖어 살다보면 오히려 그 문화를 공정하게 비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관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정신분석이라는 제삼자의 눈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문화를 해석함으로써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의 본래 목적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마음의 상태를 바로잡아주는 것임을 생각했을 때,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 문화와 우리의 자화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역사 인물과 문화에 대한 저자의 정신분석적 접근은 몹시 거북한 용의 역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라며, 정신분석적 접근으로 우리의 본질과 실체를 똑바로 직면해 볼 것을 강조한다. 처음에는 입에 쓴 약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통해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인물들의 무의식과 그 내면
저자는 이 책에서 정신분석의 해석 범위를 한국인과 한국문화로까지 확장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1부에서는 한국문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해석한다. 인간 본연의 성적인 소망과 상징을 담은 구지가, 사회적 압력의 탈출구였던 민담, 극단적인 모태 회귀본능인 풍수지리설, 환상으로 덧칠한 고대사 논쟁을 다룬다. 또한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의 심리적 퇴행인 종말론, 원초적 욕망을 억제하는 사회적 안정 장치인 금기어, 섹슈얼리티의 무절제한 범람인 대중문화, 집착하고 왜곡되는 혈액형 성격론이 1부의 주된 내용들이다. 문화란 다양한 심리적 특성을 지닌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이루어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이 일궈낸 문화현상의 심리적 배경을 탐색하는 일은 문화적 성숙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 기초한 문화현상의 해석이나 설명은 어떤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다각적인 시도의 일부로 볼 수 있겠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자세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신뢰해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어 2부에서는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한 역사적 인물 11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폭군으로 변해가는 연산군, 두려움과 무력감에 사로잡힌 사도세자, 정체성 혼란과 가족환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광수, 고립되고 도피한 천재인 이상, 비운의 천재 나운규, 세상 모든 남성들을 상대로 투쟁한 나혜석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아버지의 죄를 대신 속죄한 우장춘, 동심의 세계로 퇴행한 자아의 소유자 이중섭, 위선적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 전혜린, 한국의 간디 함석헌, 정체성 혼란을 겪는 문화 테러리스트 백남준을 분석한다. 우리는 공적인 인물이 남긴 업적만으로 그 인물을 평가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만, 그런 업적이 나오기까지 보이지 않는 배경을 이룬 심리적 측면을 이해하게 되면 그 인물을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성장배경이나 사생활 측면을 탐색함으로써 그 인물에 대해 좀더 균형 잡힌 이해를 도모하고자 했다. 다만 우리는 그런 이해를 통해서 그동안 특정 인물에 대해 개인적으로 간직했던 환상이 조금씩 깨지는 아픔도 함께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차피 진실은 그런 아픔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고, 또한 그런 아픔이 없으면 더 이상의 발전이나 성숙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 지은이
지은이 _ 이병욱
서울 태생으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신과 전문의로 활동하면서 정신치료와 정신분석에 주된 관심을 기울여 한국정신분석학회 간행위원장 및 회장을 역임했다. 1985년부터 현재까지 한림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16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저서로는 『프로이트, 인생에 답하다』 『마음의 상처, 영화로 힐링하기』 『정신분석을 통해 본 욕망과 환상의 세계』등이 있다. 제1회 한국정신분석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 책 속으로
어머니란 존재는 원초적인 그리움의 대상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모성에 대한 의존은 절대적이었다. 풍수가들이 다양하게 설명하는 명당들의 공통점은 완벽한 모성의 아늑함을 전제로 한다. 또한 풍수가들이 산수를 훑어보는 안목의 틀은 여체를 살펴보는 것과 같다. 그렇게 산과 들, 강과 계곡에서 여체의 특징들을 찾아내는 모습은 마치 신체적 결함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는 의사들의 검진 태도와 흡사하다. 지관들은 독특한 산수의 형태와 특징들을 잡아내 진단을 내린다. 그들은 모든 땅에서 모성의 모습들을 찾았으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모친의 자궁을 그대로 본뜬 무덤을 고안했다. 또한 무덤은 어머니의 둥그스름한 젖가슴도 닮아야 했다. _p.75
오이디푸스 갈등의 핵심을 이루는 근친상간 및 부친살해의 욕구가 고대 한국인이라고 결코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욕구에 대한 금기는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태도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금기 사항들의 배경에는 그런 원초적 욕망에 대한 불안이 은폐되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또한 그런 금기들의 대상은 언어·행동·의례절차·관습과 같이 다양한 방면에 걸쳐 강한 구속력을 발휘해온 게 사실이다. _p.126
인간은 말 한마디로 상대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의 언어에는 전지전능한 마술적인 기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말을 배울 때부터 부여받은 속성이기도 하다. 사랑과 미움의 감정은 마술적 사고의 형태를 빌어 언어로 발화된다. 인간은 이처럼 언어의 기능을 통해 사회적 교류와 탐색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상대를 유혹하기 위해서, 때로는 상대를 저주하기 위해서 언어가 동원된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부정적 감정이나 의도가 공공연히 표출되는 것을 억압하기 때문에, 여간해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상소리는 역기능과 순기능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다. _p.148
어쨌든 우리 사회의 혈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혈액 유형의 특성으로 인간의 모든 성격적 문제를 이해하려는 근시안적이고 편향적인 의식구조를 만들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신기하게 느끼는 일 가운데 하나라도 상대의 혈액형에 대한 관심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혈액형으로 성격을 분석하는 행태는 일본에서 건너온 실로 근거 없는 학설에 기초한 것일 뿐이다. _p.183
연산군의 정신상태는 정상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광적이어서 참혹한 일들을 수없이 벌였다. 우선 연산군의 무분별한 성적인 방종은 무의식적 근친상간 욕구의 행동화로 보인다. 연산군을 마음대로 조종했던 장녹수 역시 근친상간적 욕구를 충족시켜준 장본인이었다. 장녹수의 놀라운 심리적 통찰은 연산군의 약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 아래 두려운 것이 없던 연산군도 장녹수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퇴행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장녹수는 왕을 전하라 부르지 않고 연산군의 아명인 백돌이로 불렀다고 한다. 엄마가 아들 이름을 부르듯이 왕의 퇴행을 고의적으로 조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_p.207
이광수의 나르시시즘 상처는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광수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하기도 전에 부모를 모두 일찍 잃었으며, 동시에 조국도 잃었다. 자신을 버린 부모와 조국에 대한 원망과 좌절, 분노의 감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소멸되지 않은 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광수는 비록 우울증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분노의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광수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분노와 좌절의 잔재는 조선을 강탈한 일제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아니라 동족의 무능을 탓하는 쪽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자학적인 모멸과 치욕의 몸짓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광수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_p.247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미 부모 곁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이상은 생의 초반부터 깊은 상처를 받았다. 실제로 이상에게 말을 가르친 인물은 생모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상은 잃어버린 언어의 세계를 복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자 작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에게 말의 세계는 너무나 혼란으로 가득 차서 정상적인 말의 질서로는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이상의 무의식적 환상과 욕망의 세계는 정상적인 언어와 글로서는 전달할 길이 없지 않겠는가. 이상의 시가 난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_p.262~263
나운규의 <아리랑>은 한반도 전체를 아리랑 열풍에 휘말리게 했다는 점에서 새롭게 등장한 영화라는 매체의 폭발적인 위력을 유감없이 입증해보인 셈이다. 그런데 인간의 내적 욕망과 환상을 직접 눈앞에 보여주는 놀랍고도 신기한 영화가 새로운 예술장르로 태어난 시기는 우연찮게도 정신분석의 탄생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20세기의 출발과 더불어 나온 프로이트의『꿈의 해석』은 그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수많은 영화들을 찍어낸 꿈의 공장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나운규 역시 자신의 꿈을 영화를 통해 성취한 셈이 아닌가. _p.273
우장춘 박사 하면 우선 씨 없는 수박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씨 없는 수박 이전과 그 이후의 인간 우장춘에 대해 우리는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에서 우장춘 박사만한 거물급 과학자를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우장춘 박사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뛰어난 학자였다. 하지만 과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그가 마음속 깊이 간직한 뼈아픈 통한과 죄의식으로 인해 남은 생애에 온몸을 던져 자신의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에서 우장춘 박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_p.304
특이하게도 이중섭은 자화상,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다가도 항상 엉뚱한 내용으로 바뀌어 본인도 스스로 이상하다고 할 정도였다. 그것은 일종의 회피반응으로, 그리움이 사무치다보면 그 대상을 직면하는 일 자체를 두려워해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올 수 있다. 소위 근원적 욕구와 두려움 사이에 갈등을 겪는 유아적 딜레마 상태를 보인 것으로, 정신분석에서는 그것을‘욕구-두려움 딜레마need-fear dilemma’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애정과 관심을 끌기 위해 울고 보채지만, 막상 안아주려고 들면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서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말한다. 이중섭은 그런 이유 때문에 어머니나 아내의 모습을 일체 그리지 않았으며, 그와 유사한 동기에서 자신의 자화상도 거의 그린 적이 없다. 어쩌면 비참한 자기 모습을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소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_p.324~325
전혜린은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으며 전혜린 신드롬까지 낳을 정도였다. 전혜린의 검은 옷차림은 신비스럽기도 했지만 우울과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혜린이 그토록 사랑했던 검은색은 독일의 상징이기도 하다. 백의민족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의 상징은 흰색이 아닌가. 어쩌면 전혜린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 거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전혜린이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라며 강한 집착을 보였던 뮌헨은 나치의 발원지로 히틀러의 주된 활동무대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토록 낭만적인 1950년대 독일유학 시절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참혹한 현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에서, 뮌헨의 정취에 흠뻑 빠져든 전혜린의 무신경에 그저 놀랄 뿐이다. _p.349
“애국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든지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꾸라.”는 말을 남긴 백남준은 천성 자체가 어딘가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다. 또한 원래 백남준에게 조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동시에, 그런 무의미성 때문에 그 자신이 오히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정부주의적 이중 구속 상태에 빠져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아웃사이더로 일생을 살다간 문화적 아나키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백남준에게 조국이니 애국이니 하는 단어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_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