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대담한 작전

대담한 작전

저자
유발 하라리
출판사
프시케의 숲
출판일
2019-07-30
등록일
2020-02-05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북큐브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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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상 최고의 작전이 시작된다!”
유발 하라리가 들려주는 중세시대 특수작전 이야기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전공, 중세 전쟁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 책은 특히 오늘날 영화와 게임 등에서 대중의 상상력을 지배하고 있는 ‘특수작전’에 대해 다룬다. 요인 구출과 시설 장악, 암살 등을 목표로 하는 특수작전의 연원은 중세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하라리는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해 특수작전의 조건과 영향, 한계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왜 ‘특수작전’인 걸까? 하라리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 한복판에서 집필했다”고 말한다. “이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조직들은 이스라엘의 인구 밀집지역과 국가적인 상징을 콕 집어서 공격했고,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사령관, 정치인을 납치하거나 암살했다.” 그가 처해 있는 엄혹한 현실이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된 것이다. 하마스 등의 이슬람 조직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당장 레반트 지역에서 만연한 살벌한 특수작전의 효과를 ‘중세 전쟁사’라는 렌즈를 통해 성찰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는 트럼프 미 대통령 집권 이후, 더욱 각박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중동 정세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에서도 ‘특수작전’이 심심찮게 거론되곤 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타개책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재앙 수준의 오판 아닐까? 아니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인들이 말하듯, “정치적 암살로 대규모 전쟁을 해결하는 것은 지극히 분별 있는 일이며, 죄를 지은 소수의 목숨으로 수천의 무고한 생명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인간적인 일”(본서 66쪽)일까? 하라리는 특수작전에 대한 정의와 종류는 물론 그것의 성립 조건과 영향, 그리고 제한 사항까지 면밀하게 분석한다(제1장). 현대 서구와 중세시대의 사례가 대다수이지만, 이러한 분석을 한반도에도 요모조모 대입해가며 합리적인 생각을 도출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인간, 사회가 보이는 여섯 개의 단편들
“하라리의 글은 위트 있고, 명료하며, 우아하다.”_〈타임스〉

이 책의 구성 방식은 독특하다. 제1장에서 중세시대 특수작전을 개괄적으로 분석/해설하고, 제2장부터 제7장까지는 각 챕터마다 별도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 즉, 각기 독립적인 특수작전 이야기 여섯 편이 수백 년이 넘는 시간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 중동으로 통하는 길: 안티오키아, 1098년
- 보두앵 왕 구하기: 하르푸트, 1123년
- 콘라트 왕의 암살: 티레, 1192년
- 자루에 가득한 에퀴 금화를 위하여: 칼레, 1350년
- 십자선 안의 군주들: 발루아 부르고뉴의 흥망, 1407-1483년
- 오리올의 방앗간: 오리올, 1536년

각 사건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이 저마다 다르며, 이에 따라 역사 속에 명멸한 수많은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양하게 제시된다. 시대의 경우 1098년 십자군 전쟁부터 1536년 프랑스-합스부르크 전쟁까지 긴 시간대상에 위치해 있고, 사건의 무대가 되는 공간도 세 편은 중동의 레반트 지역(제2~4장), 나머지 세 편은 프랑스 전역(제5~7장)에 넓게 펼쳐져 있다. 등장하는 인물만 해도 250명이 넘는다. 하라리는 특유의 입담과 독보적인 통찰로 방대한 자료를 가로지르며, 오늘날까지도 베일에 싸인 주요 특수작전의 전말을 탁월하게 되살려낸다.

제1장은 특수작전에 대해 개괄적 분석이 이루어진다. 제2장부터는 서술의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 즉, 분석적인 서술을 멈추고 스토리텔링을 대폭 강화한다. 각 챕터에서 소개되는 특수작전 사건을 중심으로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완성도 있게 제시된다. 팩트와 상상력이 어우러진 서술이 균형감 있게 제시된다.


역경을 단숨에 반전시킨 극적인 역사의 장면들
“재미있으면서도 교양 지식이 빼곡하다.”_〈BBC 히스토리 매거진〉

하라리는 에피소드 식의 구성을 통해 특수작전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방대한 유럽과 중동의 역사가 화려하게 서술된다(하라리는 2002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울러 각 챕터 사이의 빈 공간들로 독자들의 관심과 상상력이 뻗어나가도록 유도한다. 십자군 운동과 암살조직 니자리파,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그리고 백년전쟁과 합스부르크 제국까지. 이 책을 통해 유럽과 중동의 역사에 대해 깊고 풍부한 교양지식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이 책은 등장하는 인물만 250명이 넘는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그들 간의 관계를 통해, 독자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포위된 성채, 파멸의 임박, 구원의 외침, 목숨을 건 탈출, 속고 속이는 계략, 승리의 지독한 그림자, 도박적인 모험... 이 책을 수놓는 극적인 인간 드라마들은 이른바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쩌면 모두들 제각기 ‘특수작전 하듯’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마다의 잃어버린 성궤와 상실된 어떤 것을 찾아서, 가장 ‘비용 효율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책 속에서

납치된 소수의 민간인이나 감금된 군인을 구출하는 일은 물질적인 세력균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지만, 사기를 올리는 데에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국민과 병사를 최후의 한 사람까지 모두 구해내는 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선을 다한다는 상징적인 의지와 군사적 능력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과 군인에 대한 국가의 헌신적인 의지는 현대국가에서 커다란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서구 민주국가들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적들의 입장에서는 특수작전으로 소수의 민간인을 납치하는 것이 가치 있는 목표가 되었다._21~22쪽

특수작전이 지닌 문화적 매력 덕분에 특수작전이 국민들의 사기에 미치는 잠재적인 영향력도 늘어났다. 국가의 이미지, 특히 국가의 남성적 이미지가 특수작전에 크게 녹아 있기 때문에, 작전이 성공하면 국민들의 사기가 높아지고, 실패하면 정규작전이 실패했을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사기가 떨어진다. 특수작전의 성공이 언제나 화려해 보이는 만큼, 실패는 굴욕적이다. 임무에 참가한 특수부대원들은 국가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영화관과 게임 화면에서 본 특수작전과 실제 특수작전을 동일시하는 데 익숙하다._25쪽

영지들의 충성심은 특히 내전이나 계승전쟁의 경우 변덕을 부리기 일쑤였다. 용병들의 충성심은 이보다 훨씬 더 미약했고, 병사들과 장교들은 물론 분대 전체가 전쟁을 하다 말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아예 다른 진영으로 넘어가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시에도 이런 짓은 밉살스럽게 여겨졌지만, 병사나 장교나 분대가 한 계절에는 이쪽 군주를 위해 싸우다가 다음 계절에는 반대편 군주를 위해 싸우는 일은 그들의 세계에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에는 여러 군대들이 거대한 규모의 ‘의자 뺏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_57쪽

특히 귀족들은 보통 자율적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통치자였으므로, 다른 사람에게서 명령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끼리도 서로 적대적인 경우가 많았고, 다른 귀족이 명예를 얻으면 언제나 커다란 질시가 뒤따랐다. 사령관이 이렇게 다양한 부대들을 모아 하나의 군대로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가문의 힘이나 사교적인 힘으로 이 귀족들에게서 복종을 얻어냈을 때뿐이었다. 군사적 경험이나 전술적 능력이 전혀 없는 왕손들이 경험 많고 숙련된 군인보다 더 자주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_59쪽

특수작전으로 적 지도자를 죽이거나 납치한다면 중요 방어거점을 점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군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병사들과 지휘관들의 충성심을 묶어주는 인물이 사라짐으로써, 적의 군대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속권이나 계승권 분쟁의 경우에는 상대편 군주를 죽이거나 납치하는 것이 곧 전쟁의 원인 자체를 제거하는 행위였다. 계승권 전쟁이 아닌 경우에도, 지도자에 대한 공격으로 상대편 왕국이 순간적으로 기능을 잃거나 완전히 해체된 사례들이 많다._64쪽

[암살로 유명한] 니자리파의 전성기에 중동과 유럽 전역의 왕들과 통치자들은 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쩌면 보호비도 지불했을지 모른다.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만이 니자리파로부터 자유로웠다. 오히려 니자리파가 두 기사단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십자군 회고록을 집필한 장 드 조앵빌은 이 이상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니자리파의 지도자가 “만약 템플 기사단장이나 병원 기사단장을 죽인다면, 그들에 못지않게 유능한 사람이 다시 그 자리에 앉을 터이니 그들을 죽여서 얻을 이득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에 자신의 아사신들을 희생시킬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두 기사단은 가문의 사업이라기보다 관료적인 조직이었고 가문과 영지보다는 위계적인 규율로 유지되는 단체였으므로, 지도자를 제거해도 그들의 기능이 심각한 악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_65쪽

암살과 납치의 가장 큰 약점은 불명예스러운 싸움방법이라는 점이었다. 암살과 납치는 당시를 지배하던 정치문화의 약점을 온전히 이용하는 한편, 바로 그 문화 전체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전적인 ‘죄수의 딜레마’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암살과 납치를 가장 먼저 조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엄청난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만, 곧 모든 사람이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 정치질서도 변할 것이고, 이것이 모든 통치자들에게 달갑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군사적 수단으로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암살에 의존했던 중세의 중동과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안정적인 왕조와 영지를 찾아보기가 서유럽에 비해 훨씬 더 힘들다는 점이 좋은 예다._74~75쪽

루이의 주군인 프랑스 왕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포로가 됐을 때 아주 다른 행동을 보였다. 탈출하지 않겠다고 명예를 건 맹세를 한 그는 자신을 구출하려는 프랑스 측의 시도를 막았다. 나중에 그는 몇 가지 조건을 걸고 석방되었는데, 그중에는 이 조건들의 이행을 보장할 인질로 프랑스 왕족 몇 명이 칼레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보내진 인질 중 한 명(장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이 맹세를 깨고 칼레에서 도망치자 국왕 장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스스로 잉글랜드의 손에 자신을 넘겨 다시 포로가 되었다._79쪽

14세기 초에 유럽에 화약을 소개하고 최초의 화약무기를 개발한 수상쩍은 인물들은 닐스 보어 같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작업이 군사적 세력균형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도 어느 모로 보나 미미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이탈리아의 군주들이나 군 지휘관에 비해 군사적, 정치적 가치가 훨씬 낮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꿈꿨던 잠수함, 헬리콥터, 탱크가 현대 독자들에게는 감탄의 대상인지 몰라도, 르네상스 통치자가 그런 물건들을 실제로 만들려고 시도했다면 그저 귀한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_80쪽

야기시얀은 내부의 수비대와 외부의 포위군이 서로 종교와 인종을 둘러싼 증오를 품도록 선동해서 탈영과 배신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십자군 병사들이 훤히 볼 수 있는 곳에서 여러 포로들을 죽을 때까지 고문했다. 십자군이 가끔 자기네 포로에게 야기시얀 못지않은 잔혹한 짓을 한 것이 이때 야기시얀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십자군은 죽은 튀르크인들의 머리를 잘라 성안으로 쏘아 보내는 짓도 여러 번 저질렀다._114쪽

보에몽은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피루즈를 믿기로 마음을 굳혔다. 1098년에 이미 40대 후반이던 보에몽은 너무나 많은 좌절을 겪은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조상들의 본을 따라 후손들에게 정복자로서 이름을 남겨줄 생각이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았다. 그는 이 기회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피루즈를 믿어도 된다고 자신을 설득한 보에몽은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_126쪽

보에몽은 아래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함정을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길게만 느껴지는 몇 분이 고통스럽게 흐른 뒤 겨우 60명가량의 병사들만 사다리를 올라가 두 자매 망루와 인접한 다른 망루 두 개를 장악했다. 피루즈는 이때쯤 머릿속에서 뭔가가 끊어졌다. 도대체 무슨 작전이 이런가? 보에몽은 모두를 죽일 셈인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들의 존재는 곧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병사의 검이 운 나쁘게 방패와 챙강 부딪히거나,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헛발을 디디기만 해도 인근 망루들에 비상이 걸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경비대장도 곧 되돌아올 터였다. 안티오키아를 손에 넣을 작정이라면 지금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피루즈는 분통을 터뜨리며 이미 망루로 들어와 몸을 숨긴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프랑크족이 너무 없잖아! 영웅 보에몽은 어디 있어? 그 무적의 영웅은 어디 있냐고?”_134쪽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의 작전 계획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이제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애당초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것 아니냐고 해도 될 정도의 문제였다. 베스니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하르푸트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어려운 문제로 보았던 것 같다. 만약 하느님의 가호로 요새에 돌입해서 포로들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돌아 나오는 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에데사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따라서 구출하러 온 사람도 구출된 사람도 모두 적의 영토 깊숙한 곳에 있는 요새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_157쪽

니자리파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비밀조직의 기억을 후세에 남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단어를 유럽의 언어에 선사해주었다. 이 단어는 핵심적인 인물에 대한 계획적인 살인을 군사적 도구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assassin’은 아랍어 ‘하시신hash?sh?n’(‘마약 해시시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상대를 경멸하는 호칭)에서 유래했는데, 적대적인 무슬림 문헌들에서는 때로 이 단어가 곧 니자리파를 의미했다._177쪽

니자리파는 11세기 말에 페르시아 북부에서 생겨난, 과격한 천년왕국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라져 나온 이스마일파 역시 시아파에서 갈라져 나온 과격파 집단이었다. 니자리파의 교리와 행동은 주류 수니파와는 정반대였으며, 심지어 대다수 시아파와 이스마일파도 그들을 몹시 싫어했다. 니자리파는 1135년과 1138년에 각각 수니파 칼리프를 암살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164년에는 심지어 ‘qiy?ma’, 즉 시간과 율법의 종말을 선언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무슬림 율법의 모든 금지사항들을 공식적으로 폐지해버리고, 신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거나, 돼지고기를 먹거나, 라마단 때 잔치를 벌이거나, 메카를 등지고 기도하는 등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권장했다. 그들의 교리와 행동은 수니파, 시아파, 온건한 이스마일파, 고위 성직자, 세속 권력자 모두의 두려움과 적의를 샀다._177~178쪽

1170년대 중반에 살라딘이 니자리파의 근거지를 공격했을 때, 시난은 반드시 살라딘에게 직접 은밀히 자신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지시와 함께 전령을 파견했다. 당연히 암살을 두려워한 살라딘은 전령의 몸을 철저히 수색했다. 그 결과 전령의 몸에는 무기가 전혀 없음이 드러났는데도, 살라딘은 호위병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전령은 살라딘과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만 시난의 말을 전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살라딘은 시종들과 호위병을 물러나게 하는 데 동의했지만, 가장 충실한 맘루크 호위병 두 명은 남겨두었다. 전령이 그들도 내보내야 한다고 고집하자 살라딘은 “나는 이 아이들을 내 아들로 생각한다. 이 아이들과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며 전령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전령은 두 맘루크를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내 주인의 이름으로 이 술탄을 죽이라고 명한다면 그리하겠느냐?” 맘루크들은 칼을 빼들고 명령만 내리시라고 말했다. 전령은 맘루크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기가 질린 살라딘은 서둘러 시난과 화해했다._195쪽

피다이는 벌건 대낮에 길거리나 모스크 같은 공공장소에서 표적을 칼로 찔러 죽일 때가 많았다. 그것도 표적이 호위병과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피다이는 표적 휘하에서 일하는 신분을 획득했을 때에도 보통 일부러 공공장소에서 그를 칼로 찔렀다. 은밀한 방법을 깔보면서 가장 직접적이고 눈에 띄는 방법으로 표적을 살해함으로써 니자리파는 자신이 적의 보안 조치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보여주었다. 아무리 보안 조치를 취해도 자신을 도저히 방해할 수 없음을 드러내서, 잠재적인 표적과 일반 대중에게 모두 자신의 능력과 성공 사례를 널리 광고한 것이다._201쪽
한편 샤르니는 부대와 함께 불로뉴 문 앞에서 기다리며 불안감을 감추고 시간도 보낼 겸 롬바르디아인들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저 롬바르디아인은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우릴 여기서 얼려 죽일 작정인가.” 샤르니가 말했다. 그러자 페팽 드 비에르가 대답했다. “장군님, 하느님께 맹세코 롬바르디아인들은 교활합니다. 놈도 지금쯤 금화를 일일이 살펴보고 있을 겁니다. 혹시 가짜가 섞여 있나 하고요. 금액이 맞는지도 확인할 겸 해서요.” 그때 마침내 불로뉴 문이 열렸다._213쪽

반역을 저지른 여자들은 화형을 당하지만, 잉글랜드의 남자 반역자들은 1241년부터 교수형 뒤 시체를 조각내는 벌을 받았다. 이 형의 집행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반역자를 모든 사람 앞에서 처형장까지 끌고 간 뒤, 교수형을 집행하되 목이 부러져 죽기 전에 줄을 끊어 그를 아래로 내린다. 그리고 아직 의식이 있는 반역자의 생식기를 잘라 그의 눈앞에서 불태운 다음, 창자를 끄집어내 역시 불에 태운다. 마지막으로 시체의 목을 베고, 목이 없는 시체를 다시 네 조각으로 자른다. 이 네 조각과 머리는 보통 여러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왕의 법과 힘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_234쪽

중세와 근대 초기의 많은 제국들은 기존의 군주 가문들이 자손을 생산하지 못한 덕분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수백 년 동안 외부의 침략을 막아낸 왕국이나 제후령도 왕실의 씨가 마르면 통째로 잡아먹혔다. 군주가 정당한 후계자를 내놓지 못하면, 탐욕스러운 친척들과 이웃나라들이 곧 독수리 무리처럼 그 주위를 맴도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다음에 침략 전쟁이나 내전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군주의 자손이 딸밖에 없을 때에는, 공주의 지참금을 노리는 구혼자들이 역시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원래 서로 원수 같은 사이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아라곤과 카스티야가 각각 영국과 스페인으로 통일된 데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근대 초기의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한 경위도 마찬가지다._249쪽

프랑스 내전은 잉글랜드의 침공에도 거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이제 내전은 부르고뉴 공작과 젊은 프랑스 왕세자인 샤를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헨리가 노르망디의 수도인 루앙을 점령한 뒤에야(1419) 비로소 화해하는 데 동의했다. 장 공작과 샤를 왕세자는 평화회담을 위해 몽트로 다리에서 만났다. 양자 간에 영구적인 평화를 약속하고 잉글랜드에 맞서 함께 싸우기로 약속하는 것이 회담의 목표였다. 하지만 평화회담은 엉망이 되었다. 순간적인 충동이었는지 미리 계획된 음모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왕세자 측 수행원 한 명이 전투 도끼로 장 공작의 머리를 쪼개버린 탓이었다._252~253쪽

루이는 무장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장원 주위에 도랑을 파고, 철창을 담처럼 둘렀다. 장원의 네 귀퉁이에는 두꺼운 철판으로 망루를 지어 석궁병 스무 명을 배치하고, 성문이 열리기 전에 접근하는 사람이 보이면 무조건 활을 쏘라고 지시했다. 밤이면 성문은 항상 굳게 닫혔고, 아침에도 여덟 시 전에는 결코 열리지 않았다. 400명의 궁수들이 성문을 지키면서 밤낮으로 주변을 순찰하며 기습을 경계했다. 루이는 특히 인근 마을과 도시를 감시하고, 수상쩍은 외지인을 쫓아내라고 그들에게 지시했다. 코민은 승승장구하던 왕이 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마치 사로잡힌 범죄자처럼 자신만의 두려움 속에 갇혀 살았다면서, 인간의 얄궂은 운명을 돌아보는 말을 남겼다_318~319쪽

카를은 성공을 확신한 나머지, 공식적인 역사서 집필을 맡은 파울루스 요비우스에게 다가올 승리를 기록할 지면을 많이 남겨두라고 지시했다. 마르탱 뒤 벨레는 황제가 프랑스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붙은 용병대장에게서 프로방스의 상세한 군사지도를 얻었다고 썼다. 16세기 초에 군사지도는 아직 신기한 물건이었다. 카를 5세는 이 지도를 얻고 몹시 흡족해하며 철저히 지도를 연구하는 데에 “자신의 욕망과 애정을 모두 쏟아부었다.” 지도를 손에 넣었으니 그 지역을 이미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_328쪽

그러나 그를 눈여겨본 중요 지휘관들이 곧 죽어버렸기 때문에, 몽뤼크는 1528년에 불만에 차서 군대를 떠날 때까지도 하급 장교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전리품은 호박단 30엘이 전부였다. 그는 이 천으로 부상당한 팔을 싸매고, 남은 천은 팔이 충격을 받지 않게 완충재로 썼다. 그러고 나서 6년 동안 그는 가스코뉴에서 가난한 지주로 살면서, 나바라 왕의 군대에서 일반 중장병으로 복무했다. 가정을 이루어 살면서도 그는 전쟁을 꿈꾸고, 안달하며 짜증을 냈다. 프랑수아 1세가 1534년에 다시 적대행위가 시작될 것을 예상하고 새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을 때, 몽뤼크는 자신이 그동안 만든 수많은 아이들과 농사를 아내에게 맡겨버리고 30대의 나이로 기꺼이 군에 다시 입대했다._342~343쪽

몽뤼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에게 화승총을 쏜 파수병은 지금쯤 다시 장전하느라 여념이 없을 터였다. 아주 편안한 상황에서도 화승총 장전에는 적어도 1분이 걸렸다. 그렇다면 지금 몽뤼크의 부대가 상대해야 하는 화승총은 두세 정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타반 영주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일부러 용감하게 함정에 머리를 들이밀 작정이었다. 그러나 몽뤼크가 그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병사를 붙잡아 안쪽으로 밀어버렸다. 확실히 명예에도 한도가 있는 모양이었다._3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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