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정보
마음이 헤맬 때 몸이 하는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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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헤맬 때 몸이 하는 말들

저자
디아 저
출판사
웨일북
출판일
2018-06-19
등록일
2019-02-12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3MB
공급사
YES24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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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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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본문 일부

서문: 몸을 잊은 그대에게 中
<새로운 시작>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게임테스터라는 선망받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포클레인 운전기사가 되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불행한 건 흙의 감각, 몸의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게임 속의 전투기를 조정하는 대신 실제 포클레인의 핸들을 잡는 훈련을 시작한다.
이와 비슷한 실제 예는 많다. 최근 한 철학자가 모터사이클 정비사가 되어 쓴 책도 유럽에서 주목을 받았다. 교편을 내려놓고 농사짓는 사람, 프로그래머를 하다가 목수로 전향한 사람을 알고 있다. 펀드매니저가 칼을 잡고 요리사가 되는 일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식 노동자로 모니터 앞에서 살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모 세대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몸으로 노동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온 데 있다. (…)
우리 부모 세대는 지식 노동자가 되는 것이 삶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는 일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실제 우리 삶에선 자주 흔들린다. 땀 흘리지 않고 온종일 컴퓨터와 마주 앉아 하는 일이 몸으로 하는 일보다 반드시 더 행복할까? (중략)

얼마 전에 연극배우인 지인이 박사 논문을 쓰느라 한동안 공부만 했더니 몸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몸매가 바뀌고 어디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몸이 바뀌었어. 공연을 봐도 감동이 없어. 뭘 봐도 재미가 없어. 느끼지를 못하는 거야. 머리로 분석하고 비판만 하게 돼.”
몸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던 사람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작업을 반복하면서 ‘모드’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는 머리로 생각하는 일이 몸의 감각을 앗아간 것 같다며, 한숨 쉬었다.
몸의 감각과 공감 능력은 연결되어 있다. 여행을 가면 몸도 마음도 이완된다. 감각이 되살아난다. 음식도 더 맛있고 별것 아닌 풍경에도 마음이 머문다. 마음은 보드라워진다. 웃음도 많아지고 사소한 것에도 눈물이 난다. 이로써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은 척 사는 일상의 단단한 봉인이 풀린다. (중략)

몸은 단지 마음을 싣고 다니는 도구가 아니다. 그 자체로 완벽한 지성을 갖고 있다. 몸은 마음이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살면 좋은지 속삭여준다. 때로는 삶을 더 단순하고 가볍게 만들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문학을 공부할 때 느끼는 헛헛한 지점, 실은 매우 중요한 몇 퍼센트의 앎을 삶 속에서 일깨워준다.
몸을 자꾸 잊으라고 권하는 사회에 저항하고 싶다. 몸을 삶으로 더 가까이 데려오고 싶다.
몸이 부드러워지면 마음도 부드럽게 바뀐다. 내가 부드러워지면 세상도 부드럽게 다가온다. 이는 새로운 언어가 아니다. 단지 잊었거나 삶의 어느 시점에서 놓친, 몸이 건네 왔던 말들이다.

아, 나에게 다리가 있었지! 中
우리 세대야말로 생각, 사색, 사유, 공상 속에 살고 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문자를 보고 생각하는 일이 몸에 배도록 훈련받았고, 밥벌이도 문자와 서류로 한다. 거기다 인터넷의 화면 텍스트를 열심히 좇고 사니까, 사유의 세계에 최적화되어 있다.
사유의 세계에서 몸은 가만히 있으면 된다. 가만히 있을수록 더 좋다. 머리와 눈, 손가락을 살짝살짝 반응해주면 된다. 디지털 기기와 책상과 의자는 나를 계속 앉아 있도록 끌어당긴다. 집과 일터, 심지어 친구들을 만나서 노는 공간도 그런 동선과 원리로 디자인되어 있다.

출판사에서 일할 때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의자를 내려다보다가 가끔씩 놀라곤 했다.
‘아, 나에게 다리가 있었지!’


몸을 뚫고 나오는 일 中
촛불혁명이 가르쳐준 것이 하나 더 있다. 역사는 소셜 미디어로 바뀌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읽고, 사유하고, 소통해도 몸 한번 움직이는 것에 못 따라갔다. 촛불만큼 작은 몸일지언정 그곳에 데려다놓았더니, 몸과 몸이 만나서 소리를 냈더니, 진짜로 세계가 움직였다.
혁명革命은 사전에서 이렇게 풀이한다.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깨뜨리고 세우는 일은 사상이 몸을 뚫고 나오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몸이 움직여서 이런 일들을 해냈다. 그러고 보면 사유가 차고 넘치더라도 몸으로 나와야 변화한다.
한 사람의 삶에서 혁명의 순간도 그렇다. 변화해야 해, 하고 되뇌면서 많은 시간 동안 생각과 고민이 차고 넘치다가 어느 날 문득 한 걸음 내딛는다. 혼자만의 내밀한 혁명이라면 이런 그림이 떠오른다. 훗날 돌아보면 이 한 걸음이 진짜 변화의 시작점이다.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첫 번째 행위치고는 너무 사소해 보이더라도.
어쩌면 삶에서 필요한 건 멋진 사유와 좋은 텍스트보다 한 걸음일지 모른다. 사유는 몸으로 나오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 행복하세요? 中
인생 사건이든, 소소한 일상이든 행복은 오감으로 몸과 함께 온다. 그 순간에 그 풍경을 봐서, 그 사람의 손이 따뜻해서, 그 눈빛을 봐서, 그곳에 그 음악이 있어서, 내 숨이 살갗으로 느껴져서 행복하고 살아 있음을 느낀다.
행복감은 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각이다. 몸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식물이 햇볕 쪽으로 온몸을 향하듯이, 행복한 감정을 일으키는 쪽으로 몸을 돌려가며 산다. 행복에 대한 센서는 살아 있는, 더 생생하게 살고자 하는 몸에서 나온다.
몸을 알아가는 일은 결국 자기만의 행복을 찾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몸 감각 회복이 징검다리가 된다. 세로토닌이라는 행복 전달 호르몬에 대해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말로 알아야 하는 건 세로토닌이라는 이름과 개념과 원리가 아니다. 내가 어떤 곳에서, 누구와 있을 때,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내 삶에서 탐구해야 하는 건 바로 이것이다.

물의 시간이 필요하다 中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다. 갓 태어난 생명일수록 더 부드럽다. 새싹은 보들보들 부드럽고 연하다. 떨어지는 가랑잎은 버스러질 정도로 메말라 있다. 아기들의 배는 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말기 암 환자의 배는 나무판처럼 딱딱하다.
생명력이 넘칠수록 부드럽고, 죽음에 가까울수록 딱딱하다. 굳어가는 노화를 막을 수 없다. 억지로 막아서 될 일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굳어가고 있다. 다만 시간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끼어들어 몸-마음을 굳게 한다면 살펴봐야 한다.
몸의 어딘가가 물길이 끊어지고 막히면, 말라가면서 굳는다. 왜 카프카가 그레고리를 하필이면 벌레로 변신시켰는지 이제는 알 만한다. 이 천재는 20세기 초에 어떤 힘이 우리를 딱딱한 몸으로 변신시키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물이 잘 흐르게 하라. 마음이 한곳에 지나치게 머물지 말게 하라. 몸이라는 물이 이야기한다. 몸의 소리는 곧 물의 소리다.

몸은 기억하고, 나를 표현한다 中
몸이 원하는 소박한 행복은 무엇일까? 몸이 나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어 하는 건 무엇일까? 몸이라는 텍스트는 언제나 말을 건넸고, 또 이 순간에도 건네고 있다. 몸은 내 경험들을 기록하는 동시에, 지금 살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킨다. 어쩌면 우리는 자아 찾기를 추상적 개념 속에서 해온 건 아닐까? 몸의 감각이 알려주는 방향은 어디일까?

‘열심히’보다 ‘부드럽게’ 中
사람이 언제 부드러워질까? 행복한 상태에서 경직되는 사람은 없다. 몸도 생각도 감정도 인간관계도 부드럽다. 느슨하게 풀어진다. 반대로 뻣뻣하다는 건 몸-마음이 편하지 않은, 행복하지 않은 긴장 상황에 자주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힘주는 훈련을 하며 산다. ‘열심히’ 하려 할 때 몸에 힘이 들어간다. 또 마음이 풀어질까 봐 그 힘을 계속 붙든다. 이렇게 경직된 상태가 평소의 모드가 된다. 일은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고, 놀기도 열심히, 심지어 사랑도 열심히.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만의 강박이기도 하다. 일터에서, 삶에서 열심히 해왔을수록 힘 빼는 걸 잘 못한다.

잘하려는 마음도 군더더기 中
인도 고대 서사시로 이루어진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바라는 마음이 없는 순수한 열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대하지 말고 그저 하라.’ 이렇게 하면 연인이 더 고마워하겠지, 이렇게 해주면 직원들이 좋아하겠지, 이렇게 하면 잘했다고 칭찬받겠지, 결과가 이번에는 더 좋아야 할 텐데 하며 행하는 행위는 기대 심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때 몸은 무거워진다. 어딘가에 불필요한 긴장이 들어간다. (…) 잘하려는 마음은 군더더기라고 몸은 긴장으로 이야기해준다. 마음을 쓸수록 비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오히려 집중력을 키우면 잘하려는 마음이 끼어들 틈이 없다. ‘무심으로 행하라’는 불교의 교훈과 비슷하다. 집중하지 못할수록 마음의 군더더기는 셀 수 없이 많이 붙는다. 잘하려는 마음, 불안감, 질투심, 산만함, 죄책감…… 그럴수록 몸은 길을 잃고 호흡은 흐트러진다.

인생을 실험해본다 中
캘리포니아 한 초등학교에서는 체육 시간 말고 매주 운동장을 달리는 ‘나의 달리기My Run’ 시간을 갖는다. 각자의 리듬대로 운동장 4바퀴 1마일(1.6킬로미터)을 뛴다. 매번 기록을 재고 자신의 ‘나의 달리기’ 카드에 적는다. 달리기 파트너가 있어서 서로 기록을 재준다. 이 카드는 성적표에 반영되거나 상을 주는 데 쓰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 볼 수 있는, 자신만을 위한 카드다.
처음에 운동을 싫어하는 학생은 이 시간을 매우 지루해한다. 그러나 자신의 기록과 컨디션, 그때그때 달라지는 마음 등을 경험하면서 자세가 달라진다. 이 시간은 스스로를 위한 배움의 장으로 바뀐다. 그 시간을 즐기게 된다. 수련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단순한 달리기일 뿐인데, 마음까지 들여다보게 되고 발전을 경험한다.
누구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들여다보기로 모드를 만들어주니까 학생들의 태도가 바뀐다. 외부로 향한 시선이 내부로 향한다. 서로 간의 경쟁이 아닌 각자 마음의 평화가 생긴다.

‘나’로부터의 자유 中
하루키는 달리기를 좋아한다. 한번은 100킬로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11시간 42분 만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런데 그는 이 대회에서 75킬로미터를 지나면서 묘한 심리 상태를 겪었다. 피로감이 사라지면서 생각이 텅 비었다.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기운을 느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진 생각이 중요하지 않구나 하는 고요한 경지를 체험했다.

(중략) 하루키는 달리다 보니 나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순간에 ‘나’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옥 밖을 나와 하늘도 보고 바람 냄새도 맡았다. 그 순간 여행자가 되었다. 물론 달리기가 끝나고 다시 나라는 감옥으로 잰걸음으로 걸어 들어갈지라도.
그러나 감옥 밖을 자주 나와 본다면, 감옥에 갇혀 있구나 하고 알고 있다면, 조금은 달라질지 모른다. 나중에는 완전히 감옥에서 나오는 법을 터득할지도 모른다. 이 해방감을 맛보려고 마라토너는 길 위에, 요기는 매트 위에, 화가는 캔버스 앞에, 농부는 땅을 밟고 선다. 또 누군가는 그저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 순간에 붙일 이름 따위는 필요 없지만, 만약 붙여야 한다면 그것은 곧 ‘자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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